숙의(熟議)와 공론화 그리고 원전
숙의(熟議)와 공론화 그리고 원전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0.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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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과학기술이 삶의 곳곳을 파고들어 이젠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학이나 기술을 따로 다루는 잡지들은 이미 있지만, 과학과 삶을 함께 다루는 잡지는 없었습니다.”

국내 첫 과학비평 잡지를 표방하는 <에피>는 창간사를 통해 “과학과 기술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인간의 조직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둡니다. 과학이 하나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방식, 기술이 삶의 한 양식으로 구현되는 방식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것입니다. `진리'자체보다는 `진리'를 생산하는 과정, `편리'자체보다는 `편리'를 실현하는 과정이 <에피>의 비평대상입니다. 이를 위해 과학과 기술의 안과 밖, 과거와 현재, 성취와 좌절, 협력과 갈등을 골고루 지켜보고자 합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원자력 발전은 `과학'이다. `사물의 현상에 관한 보편적 원리 및 법칙을 알아내고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나 학문'이라는 사전적 정의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 과학이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에 따른 득과 실, 선과 악의 경계를 살피면 한순간에 `지식체계나 학문'이라는 정의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 원전은 이미 경제이고 정치이며, 환경과 미래의 가늠자가 되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공론위)가 건설의 계속과 원전 축소라는 절묘한 권고안을 내놓았다. 9명의 위원과 471명의 시민대표참여단이 2박3일의 종합토론회 끝에 제시한 권고안에 대해 공론위는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줬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 과정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 `공론화'와 `숙의'가 나온다.

그동안의 원전은 엄밀히 말해 국민이 결정하지 않았다. 정부 혹은 정권이 장소를 결정해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원전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는 국민은 광범위한데, 불안과 위험을 걱정하는 지역은 특정하다.

`공론화'는 아예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돈으로 보상하거나,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집단의 권위로 포장하면서 숨통을 막아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무기에는 `핵'을, 에너지 발전에는 `원자력'을 교묘하게 섞어 사용하는 시대를 꽤 오랫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살아왔다.

`숙의(熟議)'는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문제를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논의함'이라는 뜻풀이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문재인대통령의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공약은 실패하게 되었으나, 다양한 계층의 국민이 참여하는 공론위 활동을 통해 한층 성숙한 민주주의를 경험한 것은 그만큼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위안이 될 수 있겠다. `숙의'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정책의 신중한 결정과 국민의 공감대 형성과 더불어 말 그대로 심사숙고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인의 장점이자 폐단으로 지적되는 `빨리빨리'대신 깊게 천천히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계기는 물론 개발독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원전은 결국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잠재적 위협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사례를 통해 언제든 우리에게도 터질 수 있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론위 권고안이 제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판단 변화가 가장 컸던 세대가 20대 젊은 층이라는데 나는 특히 주목한다. 전문가들의 분석대로 추후 부담이 될 비용과 세금 등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라면 그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안함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 아닌가.

다만 나는 그들 20대들이 다가올 위험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함께 건설 중단에 따른 국가적 비용의 손실마저 걱정하는 현실과 이상의 절묘한 조화를 선택한 것으로 믿고 싶다.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은 계속하되 원전은 축소하라'는 결정은 모순인 동시에 상생이다.

원전은 과학이고, 과학은 곧 삶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공론위를 통해 깨닫게 된 화두는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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