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추론
사실과 추론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1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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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언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의사소통 수단이다. 물론 인간만이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의사소통이 있고, 심지어 식물들도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식물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고, 새나 짐승이 소리로 의사를 전달한다고 하지만 이 소리를 언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막강한 의사소통 수단인 고도로 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 언어를 통해서 복잡한 상황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고, 미묘한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인간들 사이에는 수많은 오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언어가 없는 동물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 왜 그럴까? 오해는 의사소통이 안 될 때 생기는 현상인데, 막강한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를 소유한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동물들보다 더 많은 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쁜 놈이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물건을 훔친 것은 사실이지만 나쁜 놈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추론한 결과다. 훔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나쁜 것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훔치는 행위는 관찰의 결과지만 나쁜 놈은 판단의 결과다. 사실과 추론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과 추론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논쟁이 싸움으로 변질하는 것은 이 사실과 추론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사실은 생각이 배제된 순수한 감각적 관찰 결과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여서 자기의 주관이 빠진 관찰된 결과만을 진술하기가 매우 어렵다. 과학은 관찰된 사실에 바탕을 둔 추론 행위다. 사실이 옳지 못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교육에서는 이 사실과 추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서 이 사실과 추론을 혼동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천안함 사건도 그렇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온 나라가 두 편으로 나뉘어 논쟁이 아닌 싸움을 했다. 이와 관련된 신문기사나 방송을 보면 거의 이 사실과 추론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추론의 문제다. 세월호 선장이 나쁜 사람이냐 아니냐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다. 사실 여부는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밝힐 수 있지만 추론의 문제는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간의 토론을 통한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모든 논쟁에서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실을 밝히는 일보다는 추론의 결과에 대한 논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논쟁은 싸움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자기의 판단을 사실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은 왜곡되고 왜곡된 사실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사실이 잘못되면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사실은 객관적으로 밝혀야 하고, 추론은 사실의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은 관찰의 결과지만 추론은 생각의 결과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제할 수 없는 것을 강제하려고 할 때 싸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사실이 추론에 우선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성숙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이 사실을 밝히는 능력과 사실이 추론에 우선한다는 자각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제 우리는 이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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