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에 대한 철학
밥에 대한 철학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7.10.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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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미

구수한 밥 냄새가 서늘한 아침 공기에 퍼진다. 좀 거창하지만, `밥에 대한 철학'을 만들어준 친구가 있다. 대학 2학년 때 내 자취방에 놀러 온 선희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며 직접 만들어 온 옷들을 구경하고 사는 얘기를 하느라 느지막이 잠들었는데, 다음날 눈을 뜨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과 된장찌개였다. 선희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두부와 된장, 쌀을 사다가 하나밖에 없는 전기냄비에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 놓은 것이다. 마치 엄마처럼.

내 자취방은 단독주택의 2층에 있었는데, 주인이 목욕탕으로 쓰려고 만든 공간을 아주 싸게 전세로 준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로세로 1m 남짓한 좁은 공간에 수도꼭지가 하나 있고, 그곳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두 사람 누우면 꽉 찰 정도의 좁고 긴 방 한쪽 벽의 높다란 곳에 목욕탕에 어울릴만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건물 밖에까지 가야 하는 것이 성가시고 밤에는 좀 무섭기까지 하지만, 주인집에서 조절되는 보일러가 꺼지면 새벽녘에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떠는 일이 잦더라도, 씻는 장소가 좁아도, 나름 아늑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내 형편에 어디서도 그렇게 싸게 내 공간을 마련할 수는 없었고 거기서 밥을 해 먹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괜찮았다.

당시 아침은 거르고 하루에 한 끼 제대로 먹는 것이 점심이었다. 사서 먹는 밥이라고 남기지 않고 먹다 보니 저녁까지도 배고프지 않았고 늦은 저녁에 출출하면 과자나 라면을 먹었다. 선희의 밥상은 다소 충격이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 미안하고, 내 식습관과 게으름을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철학'을 생긴 건 이 시점이 아니다.

선희가 해준 아침을 먹고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를 구경하고 점심을 먹으러 학교 주변 식당에 들어갔다. 그녀는 모든 게 신기하고 즐거운 것 같았다. 반찬마다 감탄하며 내게도 먹어보라고 권하고, 직접 젓가락으로 집어서 내 입에 넣어주고, 마치 처음 보는 진수성찬인 듯 맛을 설명했다. 함께 흥분되고 즐겁기도 했지만, 사실 주변 보기에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선희가 돌아가고 바로 내 식습관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타났다. 우리는 간혹 각자의 역할에 따라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한 자세를 갖게 된다. 특히 어느 것보다 가장 강력한 역할은 엄마여서, 아이에게 잔소리하기 위해서라도 밥을 잘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빗질 후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는다. 나는 이런 황당한 이유에서 엄마가 된 걸 감사할 때가 있다.

나는 자주 아이들에게 반찬마다 영양소를 설명하면서 먹어 보라고 권하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밥 위에 놓아주고, 겨우 몇 가지뿐이지만 맛과 영양을 얘기해주며 골고루 먹게 신경 쓴다. 엄마의 추임새로 찬이 하나 느는 셈이다. 골고루 먹는 사람은 호기심도 많고, 탐스럽게 먹는 사람은 의욕과 열정이 넘친다고, 밥알 하나하나는 농부의 땀이라고 나름의 철학을 두 딸에게 주입하면서 난 가끔 내 친구의 추임새를 생각한다.

엄마랑 먹으면 뭐든지 맛있게 보인다는 말이 듣기 좋다. 밥 먹듯이 매일 하는 모든 것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느새 내가 그날의 선희와 닮았다. 가을의 휴일 아침, 햅쌀로 하얀 쌀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이며 친구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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