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괴산의 인물 `유근'
역사속의 괴산의 인물 `유근'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10.1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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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유근(1549~1627)과 주지번이 주고받은 글 [호산승집]이 괴산읍 제월대의 외롭고 고독한 정자 고산정에서 400년이 지난 지금도 찾아오는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유근은 1600년에 예조판서에 제배되고 호조로 옮겨 벼슬에서 물러났다.

1603년(선조36)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溫祚廟)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의정부 좌참찬 겸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임진년의 호종한 공로로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2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의정부 우찬성겸 세자이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국정을 농단하여 어지러워지자 사직하고 괴산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1613년(광해5)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가 시골로 피하여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 되었다.

1619년 다시 서용되어 원래의 봉호에 복직되었으나 은거하여 병을 치료하며 한 번도 조회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병으로 죽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고 조회를 거두었으며 조제(弔祭)를 예로써 하고 관에서 장례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괴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소수면 몽촌리에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시문에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총 8권 3책의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이다.

괴산 8경 안에 있는 괴산읍 제월리에 고산정(孤山亭)을 지었다. 이 고산정 안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1558~1624)이 유근을 위해 써준 [호산승집湖山勝集]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또 은병암 암벽에 은병隱幷이라는 글씨와 제월대에 제월대霽月臺라는 주지번이 쓴 글씨를 새겨 놓았다.

명나라 사신 웅화가 1609년 지은 유회부고산정사기柳晦夫孤山精舍記와 주지번의 부사 양유년이 지은 고산구경위반송사유찬성서경국상제孤山九景爲伴送使柳贊成西坰國相題라는 시를 목판에 새겨서 걸어 놓았다. 양유년의 시에 유근이 화답한 사부사증만송정구경시운이수謝副使贈萬松亭九景詩韻二首도 걸어 놓았다.

1619년 그의 71세 때 모습을 그린 영정이 종중에 전하여 보물 제566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9년 도난을 당하여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영정은 오사모단령을 하고 있는데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하던 사람이 쓰던 검은 깁으로 만든 모자이다. 지금은 흔히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이 쓰는 모자를 이른다.

유근의 영정은 오사모단령(烏紗帽團領)의 정장 관복 본으로 왼쪽 얼굴이 7푼쯤 보이는 팔장을 낀 전신좌상이다. 사모의 높이가 낮은 것은 조선 중기 모제의 반영이며 얼굴에는 엷고 밝은 살빛을 주조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이목구비와 얼굴의 윤곽을 갈색선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묘선에 부수되는 선염처리가 없이 골상학에서 말하는 오악(얼굴에서 두드러지는 5부위)의 중심부위에만 붉은빛을 칠하는 방법은 결국 피부 아래 감추어진 골상 자체의 요철을 의식한데서 연유한 화법으로 해석된다.

한편 옷 주름 처리에도 음영삽입이 시도되지 않고 바닥에는 여러 가지 짙은 빛깔을 써서 그린 채전이 깔려 있어 조선 중기 공신상 형식의 초상화가 지니는 엄중함과 단아함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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