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다는 말
아깝다는 말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10.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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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한밤중에 다급히 응급실에 들어왔다. 여전히 잇몸 사이로 흐르는 피가 멎질 않는다. 지혈하기 위해 입안에 물고 있던 거즈도, 내 상의도 피로 뻘겋다. 피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고 어지러우면서 힘이 쭉 빠진다. 온 힘을 다해 입을 꽉 다물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치아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린다. 복용 중인 약효가 떨어져야 안심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오직 지혈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연이어 간호사는 채혈하고 의사는 응급처치를 계속하지만 급기야 목 뒤로 피가 넘어간다.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심장은 조여오고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지난여름 긴 가뭄으로 애간장을 태우던 농부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시간은 왜 그리 굼뜨게 가는지. 벽시계의 초침만 바라보며 간밤에 뜬눈으로 지새우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지혈이 되었다. 밤이 길고 무섭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다음 날 심장 병동으로 옮겨졌다. 밤새 한 모금의 목도 축이지 못한 채 온갖 채혈과 검사로 기진맥진이 되었다. 족쇄처럼 걸린 수액으로 몸은 자유롭지 못하고 얼굴은 마른 낙엽처럼 초췌하다. 즉시 치과로 보내졌다. 의사는 합병증으로 염증이 심한 탓에 치아가 흔들려 발치해야 한단다. 마취 후 의사는 무를 뽑듯 순식간에 어금니 세 개를 발치했다. 버려진 치아가 볼수록 아깝다. 밭고랑처럼 패인 텅 빈자리가 허전하다.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집에 금쪽같은 딸을 시집보낸 어미의 서운한 마음 같다고나 할까.

돌아보면 인간의 욕구를 채우고자 마구 부렸던 치아이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생명줄이 되어준 도구가 아닌가. 치아를 잃고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 치아의 생명은 딱딱하거나 질긴 음식을 잘게 부수는 일이다. 아랫니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그로 인해 위쪽에 몇 개 남지 않은 치아와 균형이 맞지 않아 씹히질 않는 것이다. 잃은 만큼 치아의 존재는 컸다. 가끔 담백한 고기를 씹으며 술 한 잔을 즐기던 낭만도 있었다. 속이 허할 때 고소한 삼겹살 맛을 어디에 비하랴. 상처 난 자리는 더디게 아물 것이다. 한동안 씹는 맛의 즐거움은 모르리. 그날 이후 식반에는 죽이 나왔다. 누가 쉬운 죽 먹기라 했던가. 묽은 죽 흘려 넣기도 고역이다. 허기를 달래려고 몇 수저 뜨지만 맛은 밍밍하고 속은 헛헛하다. 구수한 추어탕도 먹고 싶고, 순두부찌개도 생각난다. 먹는 일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은 사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런 나를 위해 딸들이 보쌈이며 피자를 사다주지만 씹는 순간 아찔하게 통증이 오는 것이다.

끼니때마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내 입 안에서 단단한 것도 거뜬히 씹어 넘겼던 입놀림이 우둔해졌다. 지금껏 고락을 함께하던 동반자인데 고맙단 생각은커녕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내 몸의 일부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곁에 있을 때는 그 가치를 모른다. 온몸을 다 내어주는 치아처럼 세상에는 힘세지 않아도 베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깝다는 말은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삶이 아니라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훗날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끼니때면 치아를 쓴다. 비록 묽은 죽을 넘길지언정 그나마 남아있는 치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날마다 부부가 밥상에 마주앉아 식사하는 시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은 어금니는 또 하나의 경전으로 나를 다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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