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을 보내드립니다
재방송을 보내드립니다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10.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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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방송사 사정으로 재방송을 보내드립니다.”

40여일이 넘었다. 내 일상의 BGM이 되고 있는 KBS 클래식 FM에서 이런 무미건조한 안내방송을 듣고 있는 기간이. 문제는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해야하는 새벽 6시부터 이처럼 지극히 무성의한 기계음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전혀 기약할 수 없다는데 있다.

공중파 공영방송인 KBS와 MBC 방송종사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이들 언론노동자들이 정작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국민들은 처음 겪어보는 긴 추석 연휴동안 산뜻하고 짜릿한 추석특집 프로그램을 만나지 못하는 씁쓸함을 견뎌야 했다. 물론 방송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니 차마 할 수 없는 방송노동자들이 황금같은 추석연휴에도 SNS를 통해 `마봉춘 세탁소'의 근황을 소개하거나, `돌아오라 고봉순'을 외치며 시름에 겨워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긴 연휴기간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특히 여론주도층에 속하는 이들 마저도 `마봉춘'이 MBC, `고봉순'은 KBS의 이니셜에서 따온 (국민과) 친근해지려는 안간힘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파업이 길어지고 있는 공중파 방송은 한 때 `만나면 좋은 친구'이거나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었다. `마봉춘'과 `고봉순'은 방송이 그런 깨끗하고 공정한 민낯으로 국민과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는 간절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고육지책이자, 임전무퇴의 처지로 치닫고 있는 방송노동자들의 파업은 정권을 떠나 언론으로서의 참다운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바뀌었고, 양대 공중파 방송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는 사이 가장 신뢰받는 방송사의 자리를 종편에 내주게 되었다. 게다가 보도부문은 물론이거니와 한류 열풍을 이끌어낸 드라마 역시 종편이 이슈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눈 뜨고 바라보기만해야 하는 굴욕을 겪고 있다.

방송계 내부 사정이야 사필귀정이라 해도 여소야대의 정치적 현실에서 정권이 바뀌자 방송장악 음모라는 진영논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국민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 정권의 입맛에 맞춰 방송노동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정론직필의 기개를 무산시켰던 음모를 철저하게 밝혀내야 하는 것이 두 공중파 방송 파업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순수하고 맑은 본질의 프레임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방송은 말 그대로 국민의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영논리에 따라 파업의 진정성을 흔들며, 오로지 정권의 논리에 가두려고 하는 정파의 저의를 알릴 힘을 찾지 못하고 있음은 불행한 일이다.

지금쯤 고뇌와 번민, 그리고 박탈감과 불안이 수시로 파업에 나선 방송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정상화되어 행복하게 마이크를 들거나 카메라를 둘러메고 현장을 찾을 수 있는 날을 누구보다도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런 날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자기반성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방송기자와 PD로서의 우월감과 지식인으로서의 자기기만은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그 시작이다. 정권에 의해 동료들이 유린되거나 농락당하고, 또 그 당시 혹시라도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면하거나 방관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도 스스로에게 필요하다. 거기에 앞으로는 오직 공정한 방송만을 위해 헌신한다는 각오와 가장 어둡고 가난한 이들에게 향하는 따뜻한 마음의 다짐이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사법기관의 수사 권력에 의한 청산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방송정상화가 길고 오래간다.

더 이상 “방송사 사정으로 재방송”을 하지 않는, `만나면 좋은 친구 마봉춘'과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고봉순'이 본방사수'를 당당하고 깨끗하게 외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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