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그 슬픔
숲, 그 슬픔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 숲해설가>
  • 승인 2017.10.0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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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상숲

계절이 바뀌는 숲에 앉았습니다. 매일이 같은 듯 그러나 다른, 숲은 단순하지만 때론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두를 깊이 사색하게 합니다.

어느새 부지런한 아이들의 겨울 준비를 목격합니다. 숲의 누구도 다가올 겨울에 맞서지 않습니다. 단지 곧 닥칠 변화를 받아들이고 준비할 뿐이지요.

나비목의 애벌레들도 부지런히 겨울준비를 합니다. 대부분 나비목의 아이들은 알이나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나지요. 물론 네발나비 과의 나비 중에는 나비의 몸으로 용감하게 겨울을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비목의 알이 자연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0.6~2%. 알 100개 중에 겨우 한 마리만이 살아남는 거지요. 어쩌다가 애벌레를 좋아하게 된 나는 항상 살아남은 자에게만 마음을 주게 됩니다. 그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영광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고 사랑도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왜인지 요즘은 죽은 99마리의 애벌레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들 중 누구는 스스로 도태되기도 하지요. 아예 부화를 못 해서 생을 시작조차 못 한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허물을 벗거나 날개돋이를 하다가 실패하여 생을 마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애벌레는 다른 종의 먹이가 되어 숲이라는 큰 그림의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새도 잠자리도 사마귀며 거미들까지 그들은 99마리의 애벌레를 먹고 또한 그들의 새끼를 먹여 길러냅니다. 그러니 99마리의 애벌레란 숲을 살리는 살림꾼인 셈이지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이제야 내 마음이 99마리 죽은 그들에게 닿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숲을 위해 애벌레들이 스스로 헌신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들이 아니었던들 숲은 존재할 수나 있을까요. 그러니 그들의 죽음은 이들 삶의 다른 말일 뿐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굳이 그 사이에 경계가 있기나 한 건지…….

그러나 그럼에도 살다 보면 때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슬픔도 있는 듯합니다. 오롯이 제 몫인 슬픔. 함께 나누려 해도 나뉘지 않는 슬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어떤 절망인가요. 함께 있다가 하나씩 지워져 허공이 된 빈자리. 그 많던 잠자리들이 하나씩 지워져 멍처럼 깊고 푸른 허공만 남겠지요. 그 많던 풀벌레들이 하나씩 사라져 발길 끊긴 적막의 땅이 될 거예요. 그들이 다가올 추위를 받아들여 유연히 제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러니 죽음이란 변화에 불과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 듯도 하지만 아마도 변화란 지금의 것과의 결별을 뜻하기도 하기에 슬픔이기도 한 거지요.

숲이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는 건 역설적이게도 변화를 받아들이는 숲의 그런 진보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종이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자가 결국 강한 자가 되어 숲이라는 시간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거지요.

그래도 아직은 그들의 변화,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은 살아남아 시간을 이어 숲일 테지만 개체는 간단없이 사라질 테지요.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앉아 이제야 겨우 죽음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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