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還鄕女), 아이 캔 스피크
환향녀(還鄕女), 아이 캔 스피크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9.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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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웰컴 투 동막골>은 내가 손꼽는 한국 영화 중 하나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분단의 현실을 적절한 위트와 해학으로 버무리면서 이념을 초월한 제3지대의 순박함을 통해 웃픈(웃기고도 슬픈)현실을 풍자했다.

나는 오늘 이런 가슴 저린 유머를 지닌 또 하나의 한국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감동을 되새긴다.

가슴 아픈 일이 유난히 많은 한국 근·현대사는, 실제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점철된 서러운 이야기들로 넘쳐나는 부끄러움이 있다.

그러나 그런 비장함이 마냥 무거울 수만은 없는 일. 해결되지 않거나 풀리지 않는 일들이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기에 풍자와 해학을 곁들인 서사는 통렬하다.

통곡하고 분노하며, 또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과 분노가 여전히 자라고 있는 한 차라리 풍자와 해학을 통해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공감대의 형성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의 `말'은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굴욕적 개인의 진실에 대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 의회에서의 `증언'을, 위안부의 고통과 한 맺힌 울분을 토로하는 발언 <아이 캔 스피크>를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손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가슴이 저절로 먹먹해져 눈물이 흐르는 이 장면만큼 주인공 나옥분과 동네 구멍가게 여자 진주댁과의 화해가 더 눈물겨운 감동이다.

남 몰래 숨겨왔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알게 된 후 그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한 미안함과 서운함을 외면으로 표현하는 여린 가슴이 우리의 이웃이고, 또 그런 고백으로 서로 부둥켜안는 뜨거움이 우리네 민초들에겐 있다.

길어진 추석연휴가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꿈꾸고, 환향(還鄕)에 가슴 설레는 시절. 역사는 억지로 끌려갔던 가난하고 힘없던 여인네들에게 환향녀라는 주홍글씨를 씌워 배척하고 외면했던 자기 학대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다.

여리고 약한 백성을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못하는 나라와 사회는 고향의 이름으로 어울릴 수 없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해야 하는 안간힘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절규로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모진 생명의 고리가 끊어져 단지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 굴욕의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는 건 비극이다.

모두가 고향을 말할 때 돌아가지 못하는 개인들은 그 긴 연휴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으로 세상을 또 원망할 것인가.

그 모질고 가난한 외로움으로 프로의 경지에 오른 단골 민원인 위안부 할머니 나옥분의 서러움을 나라와 사회는 얼마나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는가에 대한 회한이 내내 지워지지 않는 웃픈 영화 <아이 캔 스피크>.

거기에는 고의로 시장 건물을 무너지게 하려는 자본의 모순과 그에 저항하는 노처녀 순대장사 혜정의 안간힘이 대비되는 현대 사회의 질곡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담겨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숨을 끊으려 하는 압력과,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모진 삶을 이어가려는 건강한 가난함과 만나야 하는가.

모두가 귀향을 서두를 때 얼마나 많은 환향녀와 환향남들을 여전히 배척하는 우리 안의 배신을 허락해야 하는가.

바로잡고 기억해야 할 쓰라린 역사만큼 우리가 언제 제국이거나 이념에 의해 짓밟힌 개인에게 넉넉한 위로로 끌어안은 적 있었는가.

커다랗게 차오르는 달에게 묻는다. 제발 막말 말고 할 말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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