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도둑
어쩌다 도둑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9.2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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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모처럼의 반가운 햇살이다. 여름 내내 비가 오는 날이 많아 과일의 당도가 떨어지고 고추는 꼭지가 다 빠져버려 성한 게 없다. 농작물의 수확이 시원찮아 농민들의 한숨이 깊어간다. 농촌 들녘에 시름을 뿌리고 나서야 긴 비가 그치고 제 모습을 드러낸 햇빛이 대지에 다투듯이 쏟아진다. 높고 깊어진 하늘이 눈부신 가을을 마중하고 있다.

볕이 좋은 날은 빨래를 잔뜩 빨아 널고 싶다. 이불도 내어 널고 베개도 바람을 쏘여 빛도 쬐게 하고 싶다. 이럴 때는 아파트보다는 주택에 살았으면 좋겠다. 하루 중에 가장 마지막에 하는 일과가 빨래를 개키는 일이다. 제일 먼저 수건을 접는다. 몇 번으로 끝나기도 하고 돌돌 말아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접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운 적도 없는 이 일은 내겐 어렵기만 하다. 개다 보면 모양이 삐뚤어지고 제각각 되어서 마음에 쏙 들은 적이 없다. 내가 귀찮고 싫어하는 일이다. 또한 마음이 소요스러울 때 빨래를 개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똑바로 각을 맞추느라 신경을 쓰고 반듯하게 생김을 만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차분해진다.

수건을 접다가 낯선 게 눈에 들어왔다. 펼쳐보니 훔친 수건이라고 쓰여 있다. 순간, 당황하여 어찌 된 일인지 경로를 짚어 보았다.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숙소에 있던 수건이 따라왔나 보다. 짐을 실으려는데 비가 와서 그이가 머리에 쓰고 옮긴 후에 두고 온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작정한 짓은 아니지만 도둑이 되었다. 이런 글자가 새겨진 수건도 처음이지만 이런 일도 처음이다. 주인의 입장도 헤아려지지만 야박한 세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위트로 넘기기엔 가시가 날카롭다. 이대로 있기에는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자수하기로 했다.

전화로 해서 돈으로 물어주거나 택배로 보내주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어떤 게 좋은지 그이에게 물어본 내게 돌아온 답은 “왜 이렇게 세상을 어렵게 사느냐”였다. 사람들이 다 나와 같다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걸레로 쓰면 될 일을 융통성 없이 복잡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이의 지론은 쉬우면서도 간단한 문제다. 맞는 말이 아닌데도 설득력이 있었는지 왠지 귀차니즘이 내 생각을 주저앉혔다. 이렇게 우리는 그만 도둑이 되었다. 그리고 뽀얀 수건은 한순간에 그이의 차를 닦는 걸레로 전락해 버렸다.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 어디 있는지에 의해 처지가 바뀌는 걸레를 보면서 환경에 좌우되는 한 사람의 생을 짐작해보게 된다.

얼떨결에 도둑이 된 나는 발이 저린다. 양심의 체기가 걸려 있다. 나라는 집에 성큼성큼 들어와 마음을 훔쳐간 사람들도 발이 저릴까. 오히려 그들은 당당하다. 도리어 허한 내 가슴이 저리다. 잔뜩 후벼 파가고도 가져간 줄 모르고 내가 먼저 가져왔다고 곱절로 가져간다.

그들은 가져간 내 마음을 끝까지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마 지금도, 앞으로도 쭉 가져갈 것이다. 현재진행형이며 미래형이다. 그러나 미워할 수가 없다. 나의 도둑님들이기 때문이다.

긴 장마를 거두고 햇살이 녹차 밭에 내려앉는 곳. 초록의 잎에 부서지는 볕으로 찻잎이 두툼해지고 향이 깊어지는 구월의 어느 날, 어쩌다 도둑이 되었다. 우리는 도둑놈이 되었고 그들은 나의 도둑님이 되었다.

문득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날, 이런 표지판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도둑님들! 나라는 집에는 가져갈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옆집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쥔장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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