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움이 사라질 때
경이로움이 사라질 때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9.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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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외계인이 지구에 착륙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우주선이 지구에 착륙하고, 우주선의 창문을 열었을 때 전개되는 지구의 모습은 그 외계인에게 얼마나 놀라운 광경일까? 그곳이 그랜드캐니언이든, 금강산이든, 사하라 사막이든, 우리 집 뒷동산이든, 그곳이 지구의 어디라도 놀랍지 않은 곳이 있을까?

우리가 화성이나 금성에 착륙한다면 우리도 똑같은 경이로움으로 보게 될 것이다. 화성이나 금성의 자연환경이 지구의 그것보다 대단히 경이롭기 때문일까? 화성인이 있다면 그들이 지구에 와서 느끼는 경이로움이 바로 우리가 화성에 가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왜 지구인인 우리는 지구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할까? 그것은 아마도 반복되는 자극에 둔화되는 우리의 신경 조직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옛날 시골에는 뒷간이 있었다. 처음 들어갈 때는 구린내가 심하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부모의 잔소리도 처음에는 큰 자극으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다른 느낌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경은 반복되는 자극에 둔해지도록 되어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은 반복되는 자극에 둔해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둔화 현상은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삶에 대한 활력이 없어지고 새로움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지게 되기도 한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이 대자연은 참으로 경이로운 세상이다. 어린이가 처음 접해 보는 이 세상은 경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이 경이로움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놀라움은 사라지고 평범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대자연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을 자기의 관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렁이를 징그럽다고 보는 것은 지렁이와는 전혀 무관한 인간의 편견이다. 지렁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지렁이를 이해하게 되면 지렁이가 징그러운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대상, 나아가 놀라운 대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본다면 모든 존재는 경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만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경이로움, 인류의 역사에 대한 경이로움, 미술품에 대한 경이로움도 마찬가지다.

외계인이 지구에 첫발을 디뎠을 때 느끼는 그 경이로움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 대자연을 보고 시인은 시를 쓸 것이며 화가는 그림을 그릴 것이며, 음악가는 노래를 부를 것이며, 과학자는 탐구하게 될 것이다. 대자연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이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이로움은 삶의 활력이며 인류 문명을 꽃피우는 원동력이다.

경이로움이 없었다면, 과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없었을 것이다. 경이로움이 없었다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텅텅 비어 있을 것이며, 허블 망원경을 우주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원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미생물에서 공룡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경이로움이 없었다면 아직도 지구는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었을 것이며, 천둥과 번개는 아직도 제우스신의 노여움이었으리라.

경이로움이 사라지면 삶의 기쁨도 함께 사라진다. 이 대자연을 보고 시인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며, 과학자는 탐구의욕이 사라질 것이며, 예술가는 미적 영감이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정치인은 권력을 탐닉하게 될 것이고, 군인은 잔인해 질 것이며, 사업가는 이익에만 집착하게 될 것이다. 경이로움이 사라질 때 인간은 속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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