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제비
강남제비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09.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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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가을이 시작되고 맺힌 이슬이 하얗게 보인다는 백로도 지났다. 높아진 하늘에 연미복을 입은 신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정어정하다 7월이 가고, 건들건들하다 8월이 가고, 동동거리다 9월이 간다 하더니 가을 문턱을 너머서면서 여름철새인 제비들의 움직임도 보인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봄 자락에 머물고 있다. 구릉 언저리마다 나목엔 푸른 이파리보다 먼저 요염하고 교태스럽게도 붉게 핀 도리화가 은하수처럼 산자락에 붉게 띠를 이뤘다. 도리화꽃잎이 흩어지는 날이면 꽃잎 사이로 제비들의 춤사위가 벌어진다.

예전 고향집, 처마 끝 서까래 사이에 제비집이 늘 제자리인 냥 자리 잡고 있었다. 무논에 가래질할 때쯤이면 연미복에 나비 넥타이를 맨 신사처럼 강남에서 돌아온 물 찬 제비, 둥지를 여러 번 바꾸고도 일가를 이루고 또 찾아든 제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신 진흙을 물어다 처마 밑을 날렵하게 날아든다. 강남 갔던 제비가 빨리 돌아오면 풍년이 든다며 꽃샘바람 속에 날아다니는 제비들과의 해후는 기쁨이었다.

얼기설기 초리로 나뭇가지 틈새에 집을 짓는 까치와는 반대로 제비는 조금도 빈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꼼꼼하게 진흙과 지푸라기로 흙집을 짓는 것처럼 차곡차곡 몽글몽글한 진흙과 검불을 흙벽돌처럼 쌓아올린다. 어르신들은 허술한 제비집을 볼 때면 태풍이 없을 징조라며 풍년을 예언했다. 태풍으로 비가 자주 내리면 제비집이 허물어지므로 더 꼼꼼하게 짓기 마련 이러한 제비집만으로도 농사를 점치곤 했다.

제비둥지에서 여린 목을 쭉 빼고 어미가 먹이를 물어오기만 기다리는 새끼제비들, 아직 이소(아기 새가 다 자라 둥지를 벗어나 날아오르는 일)하지 못한 새끼들이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어미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둥지 안에서 펴지도 못하는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어미 제비는 두 발로 제비집 난간을 꽉 움켜잡고 꼬리에 힘을 팍 주어 지탱을 하면서 한 마리, 한 마리 활짝 핀 오이꽃처럼 입을 쩍 벌리면 새끼 입에 먹이를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눈도 뜨지도 못한 새끼제비는 옹골차게도 잘도 받아먹는다. 어미 제비는 둥지 속의 배설물도 일일이 물어다 버린다. 청결도 중요하지만 혹여나 천적이 배설물 냄새를 맡고 공격할까 봐.

밥상머리에서 어머니는 밥을 먹는 우리 모습을 늘 제비 새끼 같다고 하셨다. 난 그 말씀이 싫었다. 어둠을 밀어내고 동이 트기 시작하면 뜰에 허옇게 너부러져 있는 제비 똥을 치우며 하루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가신 제비가 미웠다. 둥지 밑에 너른 판자로 받침대를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어떤 때에는 지겟작대기로 제비가 강남 가고 난 빈 둥지를 허물곤 했다. 제비 똥 치우는 일보다 더 싫었던 것은 ‘흥부전’의 제비집을 공격한 뱀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늘 제비집을 경계하며 두려움을 끌어안고 지내야만 했다. 성경에 ‘뱀의 지혜를 가지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했다지만 제비집 근처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함을 떨쳐 버릴 수 없기에 제비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냉대했던 제비집, 그 흔하디흔했던 제비집을 요즘은 좀처럼 보기가 드물다. 머리에 허연 박꽃이 피는 나이, 제비집이 그리워지는 것은 추억을 잡고 싶은 게 아니다. 시대가 발전함으로써 자연스레 변천됨이 당연하지만 서양문물에 발맞추다 보니 우리의 문화는 사라져가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올라가는 현실을 부인하고 싶어서다. 여인네 버선코를 닮은 기와지붕, 한복의 소맷자락처럼 살짝 들려 올려진 추녀 그 우아한 곡선을 문화재단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저린 것이다.

그렇게 둥지 바꾼 계절은 처마 밑에서 세월을 먹고 있다. 누군가는 연예인, 정치인들을 두고 철새라 하는 이도 있다. 봄에 와서 여름을 나거나 가을에 와 겨울을 나기 위해 지나가는 길목에 잠깐 들르는 나그네 같은 후조지만, 오늘 난 철새라 일컫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인간적인 의리로 사회에 버팀목이 되어 밝은 빛이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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