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원과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남한강의 고인돌
역사의 기원과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남한강의 고인돌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9.2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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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큰 돌을 가지고 만든 무덤인 고인돌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쉽게 알려졌다. 무덤의 특이성과 함께 그 수에 있어서도 아주 많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고인돌 수는 전라도 지역에 2만기, 강화지구 등 약 3만기에 이른다. 전 세계 고인돌의 50%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고인돌의 나라'로 불리고 있다.

충북지역에도 약 200기 정도가 현재 조사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인류는 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생활하였기에 지금까지 조사된 고인돌은 주로 강의 흐름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그래서 고인돌 덮개돌의 긴 쪽이나 무덤방 방향이 물의 흐름과 나란히 만들어진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주와 제천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은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알맞은 삶의 터전이었기에 선사시대는 물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이 남한강 지역 여러 곳에서 조사됐다.

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고인돌의 형식에 따라 탁자식(북방식), 바둑판식(남방식), 구덩식(개석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남한강 지역에서는 대개가 지표에 덮개돌이 보이는 구덩식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었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물속에 잠겼지만 제천 금성면 황석리 마을 앞에서 대규모 고인돌 떼가 발견되었다. 현재는 충주댐 수몰로 청풍문화재단지와 충북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 조사가 1962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아주 일찍 시작된 셈이고 그만큼 고인돌 연구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지역 고인돌이 주목받는 이유는 1962년과 1983년 두 번의 조사에서 모두 사람 뼈가 출토되어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13호 고인돌에서 나온 사람은 174cm에 30대 초반의 남자로 간돌칼이 함께 나왔는데 뼈 조각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약 500년 전의 사람으로 밝혀졌다. 뼈의 특징들을 통해 현재 한국인의 골격보다 조금은 큰 사람으로 북방계통의 사람으로 본다. 또 어떤 학자는 서양인(백인)으로까지 추정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나온 사람의 유골을 통해 우리나라 조상의 기원이 북방계라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황석리 고인돌에는 특이하게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새겨져 있다. 충북대학교 잔디밭에 전시되어 있는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별자리가 마모되어 다른 별자리는 찾을 수 없지만 북두칠성과 북극성으로 보이는 자국(구멍)이 또렷이 남아 있다. 아마도 이 고인돌 주인의 영생불멸을 기원하며 새겼을 것이다. 별자리의 위치로 보아 4월~ 5월 사이에 고인돌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분명히 고인돌을 조성하면서 망자의 혼을 위로하고, 남은 자들의 삶을 지원하는 의식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황석리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우리 민족의 기원과 당시의 생활모습, 매장의식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하늘과 별을 숭상하던 우리 민족의 특성을 알게 하는 귀중한 유적으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무심히 서 있는 고인돌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든 남기고 싶어 하는 속성을 알게 한다. 아울러 고인돌을 통해 변하지 않는 그 무엇, 시간이 흘러야만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그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의 본질과 고인돌을 제작했던 사람들의 처절함과 간절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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