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엿듣기
세상 엿듣기
  • 신금철<수필가>
  • 승인 2017.09.1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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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신금철

갈맷빛 잎사귀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성급히 낙엽귀근葉歸根을 서두르는 나뭇잎들은 벌써 땅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임을 만난 꽃무릇은 활짝 웃고, 더러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수줍은 듯 벙글고 있어 아쉬움과 기쁨이 함께한다.

선운사 도솔암으로 향하는 차도와 등산로의 두 갈래 길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조붓한 숲 속 길을 향한다. 여러 번 이 길을 왔지만 언제나 돌멩이가 울퉁불퉁 솟은 이 길을 택한다.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좋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하늘이 좋아서이다. 운이 좋으면 가끔은 다람쥐와 이야기도 나누고 나무들과 침묵의 대화도 나눈다.

쎌카봉을 빼들었다. 나무를 껴안고 웃는 모습을 연출하려 애를 쓴다. 주위를 살피니 멀찌감치 뒤따라오던 아저씨에게 들켜 얼른 걸음을 재촉한다.

며칠 전 함께 기도모임을 하던 형님이 수술 후 닷새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어 묵주를 들고 그의 소생을 기도한다. 귀는 삼삼오오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두런거림을 귀담아듣고, 발은 도솔암을 향하여 열심히 걷고 있으니 내 몸은 풀가동이다.

산책을 하거나 숲을 걸을 때면 곁을 스치며 대화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말이니 행여 엿듣는다 하여 크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겠지?

그들의 대화에는 자신들의 삶 이야기와 이웃, 사회,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공존한다. 친구인 듯 대여섯 명의 무리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북한이 쏘아대는 미사일에 대한 걱정스러운 이야기이다. 애국이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라면 그들은 모두 애국자들이다. 나도 그들을 따라 잠시 애국자가 되어 나라를 걱정한다.

이번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딸 자랑들이다. 딸이 사준 등산복을 입고 왔다는 멋쟁이, 보약을 해주어서 아픈 데가 없다는 건강파, 드디어 해외여행을 보내줘서 일본을 다녀왔다는 해외파 아주머니까지 자랑이 늘어진다.

딸이 없는 나는 잠시 기가 죽는다. 아직 덜 익은 도토리 몇 개가 떨어진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 사람이 무에 딸 욕심을 부리느냐 핀잔을 주는 것 같아 나는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삽상한 바람이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내 걸음이 느렸는지 또 한 무리가 나를 추월한다. 사드 배치는 잘한 일이다, 의미 없다, 엇갈린 그들의 언쟁이 조용한 숲을 헤쳐 놓는다. 우려의 목소리가 숲을 우울하게 한다. 걱정을 잠시 잊고 심신을 맑게 하려고 왔을 텐데….

한 때 드라마보다도 정치뉴스나 토론에 관심이 많았던 때가 있다. 채널을 돌려가며 열심히 정치에 관심을 쏟는 나에게 남편은 정계에 진출이라도 하려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요즈음은 정치에 관한 내용의 프로는 보지 않는다. 안보 위기에 처한 현실이 불안하고, 여야 간의 논쟁이 별로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한동안 온 국민이 전 대통령의 탄핵, 촛불집회, 청문회를 다양한 채널로 방송하여 전 국민이 정치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무관심할 수 없는 나라의 현실이 더욱 정치에 관심을 두게 한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불안한 나라로 보고 있단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나 정치인들은 국민이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숲 속을 걸으며 엿들은 세상 역시 마음 편한 세상이 아니었다. 정치인들은 나라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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