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걷기
느림의 미학, 걷기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7.09.1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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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파란 도화지에 흰 물감으로 칠을 한 듯 하얀 구름 조각들이 조화롭게 떠있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 시골길을 마냥 걷고 싶은 충동이 인다. 몸 안에 잠재된 걷기에 대한 욕망이 꿈틀댄다. 아무런 도구도 필요치 않고 오직 팔과 다리만을 흔들어 몸을 앞으로 이동하는 걷기는 자신의 건강을 가장 잘 측정할 수 있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운동이며 수양의 도구다.

처음으로 걷기의 맛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집에서 20키로 미터쯤 떨어진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갈 때는 시외버스를 타고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문득 걸어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버스비를 아껴 용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컸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변변한 외출복이 없던 터라 외출할 때는 거의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날도 검정색 동복교복에 모자를 쓴 상태로 비포장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놀던 생각에 쉽게 생각했던 걷기가 고역이 될 줄은 상상을 못했었다. 5월 말의 따가운 햇볕 아래를 한 시간쯤 걷자 온 몸은 땀으로 젖었고 갈증으로 목은 타는 듯 아팠다. 교복 저고리와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구멍가게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를 돌부리에 채이며 한없이 걸었다. 서너 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했는데 이미 해는 지고 아버지는 돌아와 계셨다. 호된 꾸지람을 듣고 저녁밥도 거른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매일 2키로 미터쯤 떨어진 학교를 걸어 다녔어도 그렇게 긴 거리를 걸은 경험은 처음이었던지라 그날의 기억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젊은 시절의 삶은 누구나 그렇듯이 잠깐 동안이나마 걷는 여유를 부릴 만큼의 짬도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그리고 거의 반백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19일 동안 380키로 미터를 걸어 진도 팽목항에 갔었다. 아마 어릴 적 걸었던 기억이 없었다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긴 시간을 천천히 걸으면서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로드 킬을 당하는 짐승은 고라니나 고양이, 강아지뿐만 아니라 뱀 같은 파충류나 사마귀 같은 곤충도 로드 킬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걷기가 주는 즐거움과 교훈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걷기는 느림이다. 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이틀을 걸어야한다. 엄청난 비효율이다. 그런데 그렇게 빠르게 앞만 보고 달려온 모습을 돌아보면 인생이 속도와의 싸움은 아니었다는 자각이 든다. 빠르게 달리느라 놓치고 보지 못했던, 속도에 방해된다고 외면했던 모습들이 더욱 소중한 자산이고 양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런 것들을 즐겼다면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걷기는 비움이다. 겸손함이다. 걷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오직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설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장비와 의상을 개발하여 걷기를 트레킹으로 만들었고, 경쟁을 부추겨 스포츠를 만들어냈다. 이런 인간의 욕망을 비워내야 비로소 진정한 걷기가 되는 것이다.

걷기는 자유다. 그저 가벼운 산책만 해도 멈춤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부담을 덜고 잠시나마 일을 잊을 수 있다. 먼 길을 며칠씩 걷다보면 일탈의 움직임이 훨씬 더 강해져 일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일의 습관에서 벗어나고 습관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걷기,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그런데 걷기에서 얻는 자유는 이렇게 일상에서 벗어나는 소박한 자유만이 아니었다.

오래 길을 걷다가 문득 세속의 거울에 비친 내가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됐다. 그 동안의 삶속에서 불리어왔던 이름과 직업과 지위, 누구의 가족임 등을 걷어내자 한줌도 안 되는 바람처럼 가벼운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햇볕이 좋은 가을날 걷기에 나서야겠다. 사람 사는 마을로 난 길을 찾아 바람을 벗 삼아 느리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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