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의 기억법
홍차의 기억법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7.09.1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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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사람을 기억하는 법은 아주 단순하다. 아니 마음을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이 어디인 건 상관없다. 다만 그 순간 마음을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을 만나기란 어렵다. 그것이 아주 단순하고 쉬운 듯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향한 마음의 숨결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멎어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그 순간이 멎어지게 되면 두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꽤 오래전 일이다. 아마도 어림잡아 십 년은 되었을까. 중이염 치료를 받으러 원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다닐 때였다. 치료를 받고 나면 귀 통증은 물론이고 주위가 빙빙 돌만큼 어지러워 잠시라도 쉬어야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혼자서 가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누군가는 동행해 주곤 했다. 물론 운전은 내가 한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안심이 되고 오는 동안에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중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이곳 음성에서 원주까지 지금은 길이 잘 정리되어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그때는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였다.

그때 가끔 동행을 해 주시던 C여사님과 있었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학병원은 예약해도 기다리는 시간이 꽤 되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기다려 준다는 것은 여간 지루한 일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그 긴 시간을 기다려 주시고도 내가 치료를 받고 나오면 괜찮냐고 나를 먼저 걱정해 주셨다. 통증도 진정시킬 겸 우리는 1층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나는 커피를 주문하고 C여사님은 커피를 드시지 않는 분이기에 마땅한 게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홍차라떼가 눈에 띄었다. C여사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무슨 차가 이리 맛있냐고 하셨다. 그때는 그냥 아마도 오랜 기다림으로 힘드셔서 더 맛있게 느껴지시나 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분과 차를 마시게 되었다. C여사님은 그 오래된 차 이야기를 하셨다. 그 차를 또 마시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도 나는 커피를 마시고 그분께는 홍차를 시켜 드렸다. 하지만 그 맛이 아니란다. 여사님은 그 차처럼 맛있는 차는 없다고 하셨다. 우스갯소리겠지만 다시 그곳으로 그 차를 마시러 가면 안 되냐고 물으셨다. 언제나 염주를 손에 들고 다니시며 기도를 하시는 C여사님은 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나를 위한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 나를 향한 여사님의 마음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내 마음이 그 순간 절묘하게 만나 홍차의 맛을 가름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쪽 청력을 잃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그 시간은 내게 두려운 시간이었다. 평생을 반쪽의 귀만으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잘 듣지 못하여 생기는 오해의 횟수도 늘어 갔다. 그때부터 대처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무조건 웃는 것이다. 얌체보다는 바보가 나을 것 같기에 택한 방법이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점점 나에게서 약한 모습은 찾지 못한다. 요즘 세상은 처세술이 좋아야 한다고 하던데,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다.

지나간 날의 일들은 모두 추억이 되어 버린다. 아픈 기억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그 아픈 기억을 추억으로 만든 건 세월도 나 자신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상처가 딱지로 되고 새로운 살들이 나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듯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다툼과 갈등으로 점철되어지는 우리들의 일상도 서로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마치 C여사님이 기억하시는 홍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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