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샘
약샘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09.1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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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해를 쫓아가던 해바라기도 폭염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담 안에서 깨금발 들고 내려다보던 장미도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축축 늘어져 더위를 삭히고 있을 때, 나이가 들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턴을 한 기억들이 추억 속에 머문다. 한낮의 열기가 중천에 머물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점점 따가워지면, 고운 밀가루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예전의 약샘에서 등목하던 그때 묵은 시간을 들춰본다.

예전 고향 동네 분들이 찾는 곳이 있다. 아치실이란 산자락 중턱쯤 소줏고리를 닮은 차디찬 샘물이 솟는 약샘이다. 약샘은 신성한 곳으로 마을 분들은 그곳을 가려면 몸도 마음도 예를 갖추고 찾는다. 무엇보다도 약샘까지 가는 도중 뱀을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모두 되돌아와야 했다. 병원도 약국도 읍내에 있던 그때,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은 가족들을 앞세우고 지게에 솥단지는 물론 그날 먹을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약샘으로 등목을 갔다.

약샘 주변에 천으로 움막을 만들고 돌덩이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밥을 해 먹었다. 하얀 눈밭 위에 몽글몽글 솟아오른 봉우리처럼 생긴 쌀밥 속 감자를 대접에 으깨 열무김치와 양념장으로 비벼먹는 그 맛은 별미 중의 별미다. 그렇게 진종일 음식을 해 먹으면서 웅덩이에 고인 약샘을 바가지를 이용해 등목한 뒤 어둠이 빛을 삼켜 버릴 때쯤 내려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동네 사람들은 혹여나 내가 뱀이라도 볼까 봐 한가운데 세우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올랐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땡볕을 따라 산길을 오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리 약샘이 좋아도 실감을 하지 못하는 형제들이 매번 떼를 부리면, 어머니는 천렵을 간다고 우릴 설득해 따라나서게 했다. 얼키설키 잔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하늘빛에 투영된 어머니의 뒷모습, 휘돌아가는 바람에 잔 머리카락이 너울거린다.

풀잎 향을 따라 걷다 보면 등에 짊어진 지게에 그릇 부딪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맷맷한 물미장이 자갈을 툭툭 걷어내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걸었다. 딸 부잣집인 우리 가족은 잔풍에 나부끼는 어머니의 꽃무늬 치맛자락을 중심으로 앞뒤로 조잘조잘 거리며 목욕을 싫어하는 막내는 영문도 모르면서 열심히 발자국을 쫓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초록이 짙어진 산모롱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달 뜬 웃음소리는 발걸음이 무거운 어른들께 에너지로 충전된다.

그렇게 약샘에 가서 등목해야만 여름 내내 땀띠는 물론 피부병을 예방하고 치료를 한다고 하여 먼 곳까지 찾아갔다. 폭염임에도 약샘 근처에 다다르면 높드리를 타고 흐르는 바람은 오싹할 만큼 냉기가 인다. 약샘 주변 쌀을 담은 종지에 초를 세워 기도를 드린 흔적이 있는 곳, 어르신들은 정갈한 몸으로 재를 올리고 정성스럽게 약샘으로 등목했다.

그렇게 치성을 드리며 찾는 약샘. 그곳에 다녀오면 피부질환은 물론 염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사람들은 여름이면 약샘을 찾아 더위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포용하곤 했다.

올해처럼 폭염이 이는 날이면 그리움에 허기가 진다. 눈을 감고 꽃무늬 치맛자락이 나부끼던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아치실 약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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