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무제(無題)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9.1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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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김학철, 그대는 아니다.

맘 같아서는 이렇게 9글자만 쓰고 더 이상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어쩌면 그의 얕은 꼼수에 말려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은 외면이다. 게다가 존엄한 주민의 투표를 거쳐 도의원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그의 경우, 가장 못 견딜 일은 무시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빗나간 그의 행동과 어그러진 그의 망언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였고, 너무 관대하게 반응해 왔다. 각종 짐승들로 인간을 비유하는, 그리하여 현학적으로 포장하며 과시하거나 지배하려 하는 그의 한심한 작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애써 유지하려고 하는 선량한 주민들에게는 분노조차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를 뽑은 스스로의 무책임한 행위에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비단 일개 도의원의 일탈만이 아닌,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에 골몰하는 정치권 일각의 무모함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빗나가고 어긋난 일들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거리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방송인들의 탄식을 언론장악이라는 그들만의 음모로 호도하면서 덩달아 장외 투쟁에 나선 일도 어설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리고 기껏 명분조차 쌓지 못한 철수에 이르러 헌법재판소장 임명 동의안을 부결시킨 뒤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무엇이며, 게다가 얄팍한 수적 권한을 갖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엉뚱함은 또 무엇인가.

“수십 년 동안 발전 관계자들 사이에 두루 퍼져있는 관념을 하나 꼽자면 바로 <인자한 독재자>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 지도자가 무제한적 권력을 가지더라도 그 권력으로 해야 할 일은 하는 지도자의 의도는 얼마든지 좋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중략) 그리고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에 생긴 좋은 일(가령 높은 경제 성장률이나 신속한 보건 향상)을 독재자의 공으로 돌린다. 그러니까 결과가 좋으면 독재자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미국의 발전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가 쓴 <전문가의 독재(The Tranny of Experts)>에 나오는 이 말은 아직도 박통의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와 똑 닮았다. 독재는 독재일 뿐 절대로 미화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일은 철저하게 과정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오로지 결과만을 겨냥한다. 과정의 옳고 그름과 거기에 따른 철학 및 최소한의 윤리적 가치 기준조차 정치인들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울분과 분노를 억누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참고 참다가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로 지새웠던 선량한 국민 혁명의 기억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국정농단에 대한 올바른 응징과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싶다는 단호한 국민적 의지에 따른 정권교체의 대의명분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혐오시설이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여러분이 욕을 하면 듣겠다. 모욕을 주셔도 괜찮다. 지나가다 때리셔도 맞겠다. 그런데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다. 여러분 제발 도와 달라.”고 울부짖으며 끝내 무릎을 꿇은 엄마들의 피눈물 뒤에는 역시 한 보수 야당정치인의 공약이 있다.

누가 누구를 혐오하고, 누가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며,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하는가. 한심하고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데 다음 선거까지 남은 세월이 참으로 길다.

그때까지 차라리 우리 모두가 무릎 꿇는 결연함으로 꾹 참아야 한다. 흔들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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