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이야기
인삼 이야기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9.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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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미모의 여인들이 시선을 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누워 있다. 게다가 요염한 몸매와 우윳빛 피부까지, 매력적이다. 몸값 또한 만만치 않다. 누구를 선택할까? 요즘 s라인 몸매가 대세라지만, 인삼은 상체가 풍만하고 하체는 매끈하게 뻗은 것이 상품이 아닌가. 그때 굵고 탱탱한 인삼이 눈에 띄었다. 나는 선뜻 그것을 골랐다.

묵직한 인삼 몇 채를 품에 안으니 절로 힘이 솟는다. 곰이 겨울잠을 자듯 알몸으로 땅속에 뿌리박고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 온 업겹(業이 눈물겹다. 집에 돌아와 인삼 여덟 뿌리를 흐르는 물에 조신하게 씻는다.

귀한 몸, 깊은 인삼의 향기를 어찌 혼자 탐하랴. 사랑하는 이들과 온기를 나누고 싶어 유리약탕기에 인삼과 은행, 대추를 넣고 불을 지폈다. 폴폴~ 추억의 향기가 그리움을 부른다.

어릴 적 더위가 앙탈을 부릴 때면 어머니는 뒤꼍에서 인삼을 달이셨다. 투박한 약탕기를 숯불에 올려놓고 연방 부채질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비지땀을 흘리시던 어머니는 고작 수건으로 정수리를 덮으시곤 했다. 후끈한 불기운에 어머니의 적삼은 땀범벅이 되었다. 인삼 향기가 온 집안을 훑고 옆집 담장 너머로 진동할 무렵 작업은 끝이 났다. 아침부터 시작한 작업은 해거름에 비로소 갈색의 말간 진액이 완성됐다.

어려서부터 약골인 나는 어머니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학창시절 툭하면 코피를 쏟고, 면역력이 약해 고뿔도 자주 앓았었다. 체력이 좋아야 공부할 수 있다며 그때마다 어머니는 몸에 온기가 돌도록 인삼을 달여 주셨다. 철없게도 쓰디쓴 보약을 먹을 때면 어머니와 난 실랑이를 벌였다. 어머니는 알사탕으로 나를 유인하고, 어떤 날은 내 코를 잡고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그날은 내 여린 몸에 생기가 돌았다. 당신은 한 모금 넘기기는커녕 오직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걸 보며 흐뭇해하셨던 어머니. 그 정성으로 무탈하게 성장하여 결혼할 수 있었다.

다시 유리약탕기를 들여다본다. 기포를 그리며 끓는 소리가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 같고, 맺힌 물방울은 어머니 땀방울처럼 내 가슴속에 아리게 박힌다. 두어 시간 넘겼을까. 온 집안에 쌉쌀한 향내가 진동한다. 인삼은 강한 불에서 약한 불로 은근하게 장시간을 달여야 특유의 맛을 낸다. 기다림의 명약이다.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이 어디 있으랴. 제 몸을 뜨겁게 달구어야 보약으로 거듭나듯 탱탱하던 몸통도 노인의 몸처럼 흐물흐물 물러져야만 진액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머니도 인삼 같은 존재였다. 쓰디쓴 시집살이에 오 남매 키우시느라 당신 몸이 닳도록 애면글면하셨던 어머니. 인고의 세월은 묵묵히 땅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눈물로 종부의 삶을 지켜내었다. 당신 몸이 망가져 흐느적거려도 인삼처럼 허약한 이들에게 온기를 돋게 하는 숭고함이 닮았다.

간혹 삶에 진이 빠져 허우적대는 여름이면 어머니가 달여 주었던 인삼 맛이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산다는 건 서로에게 사랑의 온기를 채워주는 것, 아파하면 어머니처럼 말없이 인삼을 달이듯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깨닫는다. 기다림 끝에 진액이 말갛게 우러났다. 그리움의 향기에 코끝이 찡하다. 이젠 내가 어머니께 인삼 향을 안겨 드리려 해도, 세상 뜨시고 없으니 하염없이 찻잔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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