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독서(賜暇讀書)를 꿈꾸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꿈꾸다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7.09.0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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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바람이 삽상하다. 미뤄 놓았던 집안 정리를 한다. 에어컨 필터에 낀 먼지를 떨어낸 뒤 헹궈 바람에 널고 선풍기도 청소해 정리하니 마음도 개운하다. 빛바랜 얇은 커튼을 걷어내자 푸른 하늘이 담뿍 들어온다. 새로운 시작 같다.

거실 한 편에 놓인 묵직한 박스를 푼다. 단단하게 마감된 테이프를 떼어내며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지난 유월 작심하고 실행한 스무 해 만의 휴가는 무늬만 요란한 채 성과 없이 끝났다. 계획했던 일을 핑계로 모든 수업을 휴강하고 두 달 말미를 내며 얼마나 마음이 부풀었던가. 늘 그물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수업 스케줄에 경직된 일상은 좋아하는 책 읽기조차도 가끔은 부담이 되었다. 틈새 독서로는 독서회에서 정한 책들을 읽어내기에도 빠듯했다. 그래서 휴가기간 내내 글을 정리하는 틈틈이 미뤄둔 책들을 마음껏 읽어보리라는 기대만으로도 들떴던 기억이 난다 .

하지만 달콤한 휴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친구들을 만나 차 마시는 재미로 한 주 내내 바빴고 다음 주는 입원한 여동생 곁을 지키느라 보냈다. 그러다 남은 한 주 미뤄두었던 글들을 정리하려니 집안 구석구석 거슬리는 물건들이 눈에 밟혔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돌아오고 식사준비로 분주한 하루하루가 평범하게 흘러가버렸다. 휴가의 반이 지나는 동안 배달되어온 책 박스는 시야에서 잊혀졌다. 남은 한 달 알차게 보내야지 생각했을 땐 남동생이 아프다는 전갈이 왔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비보에 몸도 마음도 온통 동생에게 가 있었다. 다행히 고비를 잘 넘기고 한 시름 놓고 나니 어느새 휴가는 끝나고 삶은 다시 동동거리는 현실로 돌아와 있다.

그렇게 일상에 휘둘리다 `사가독서'를 꿈꾸던 오랜 숙원은 다시 버킷리스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가독서'란 1420년 세종임금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던 유급휴가에서 시작되었다. 자질이 뛰어난 자를 뽑아 독서하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던 제도인데 처음엔 집에서 독서를 하게 했단다. 그런데 잡다한 일들로 집중할 수 없음을 알고 진관사라는 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성종 때에도 <동호독서당>을 설치하여 홍문관의 학사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는데 독서당 규칙을 만들어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게 했고 정기적으로 제술시험도 보았다 한다. 사가독서 기간은 보통 한 달에서 삼개월정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긴 휴가를 주기도 했다니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에겐 일상에 방해받지 않고 여유로운 가운데 깊이 연구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일상에서 벗어나 그리 책만 볼 수 있는 사가독서는 주부를 겸하고 사는 내게 여전히 꿈일 뿐이다.

그런데 9월이 독서의 달이란다. 여러 도서관에서 책 대출 권수를 늘려주고 다양한 강연과 공연들을 통해 시민들이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홍보다. 모처럼 온 기회를 일상에 놓치고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는 적절한 자극 같다. 박스 속 새 책들이 산뜻하다. 한 권씩 꺼내 제목을 읽고 책장을 빠르게 넘겨본다. 읽은 책들만 책장에 꽂다 보니 욕심 부려 사놓고 미뤄둔 책들로 거실은 늘 복잡하다. 올가을엔 거실에 쌓아둔 책부터 정리해야겠다. 사가독서가 사치라면 틈새 독서를 즐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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