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가 이담리에 세거하기까지 - 괴산인물 ②
순흥안씨가 이담리에 세거하기까지 - 괴산인물 ②
  • 김홍숙<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09.0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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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의 인물 두 번째로 순흥안씨가 괴산 감물면 이담리에 세거하기까지를 살펴본다. 순흥안씨 문중에서 괴산과 관계가 깊은 인물은 안한과 안훈, 안명세를 꼽을 수 있다.

안한(安翰 1355 고려 공민왕4~1394 조선태조 3)은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인물로 자는 임숙 호는 모은(慕隱), 본관은 충원이다. 을미년에 태어났다 하여 초명을 을득이라 하였는데 정몽주가 그의 남다른 점을 아끼어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마치 안회(顔回)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라고 하여 이름을 재연이라 고쳤다.

안한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고려 조정에서 보문제학이 되었으나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고려가 무너지자 문광면 아미동(峨嵋洞)에 물러나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가 즉위한 후에 그의 학식과 덕망을 아껴 `보한'이라 이름을 내리고 예조판서, 대제학으로 여러 차례 기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아들 안승진, 안상진 형제가 고려 왕권을 회복하려고 획책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이때 안한 또한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발견되어 화를 당하였다.

[치식주가속 원채이제궐 恥食周家粟 願菜夷齊蕨 주나라 왕조의 녹을 먹는 것은 부끄러우니 백이, 숙제의 수양산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기를 원하노라.

정종 즉위 후 “이들 부자의 충효와 절의는 백이, 숙제와 더불어 비길만하다”라고 칭찬하며 제문을 지어 보내어 영전에 분향케 하였다.

태종 때에 당시 영의정 이직의 추천으로 신분이 회복되어 충원백(忠原伯)에 추봉되었다.

안훈(安燻)1487 성종 18~1535 중종 30)은 조선 초기 무신으로 자는 자소(子昭), 본관은 순흥이다.

할아버지는 성주목사를 지낸 안의이며 아버지는 함안군수를 지낸 지촌 안우하이다.

어머니는 세종의 왕자인 밀성군 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인품이 탁월하고 영리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술을 익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 부사과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현재 감물면 이담에 은거하였다. 이후 자손들을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여 효자로 이름난 손자 안지, 증손인 사촌(沙村) 안덕린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순흥 안씨가 감물면 이담리에 수백 호의 대성(大姓)을 이루며 세거(世居)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안명세(安名世1518 중종~1548 명종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응, 본관은 순흥이다.

고려의 명현 안축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선공감 판관을 지내고 대질로 통정대부에 오른 안우하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안담이다.

여덟 살에 시(詩)로 명성을 얻었고 송당 박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근사록과 성리대전을 늘 옆에 두고서 돈독하게 실천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법으로 아내를 대하였다.

또한 자제와 하인들을 다스리는데 은정과 법도가 있어 집안이 두루 화락하였다.

154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으며 예문과 검열에서 승정원 주서로 승진하였다가 홍문관 정자로 옮겨 임명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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