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生滅(생멸)이 있을 뿐
오직 生滅(생멸)이 있을 뿐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8.3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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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밤거리에서 화려하게 번쩍이는 네온사인 속의 그림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불빛이 제자리에서 점멸할 뿐 이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동은 착시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면에 있는 무수히 많은 발광 점들이 꺼졌다 켜졌다 할 뿐인데 우리 눈에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모두가 착시고 착각이다.

네온사인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와 운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체의 `이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곳에 발견될 `확률'만 존재한다. 물체가 이동하는 것은 그 물체가 존재할 확률분포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이다. 초속 1미터인 속력으로 운동하는 물체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1초 후에 이 물체가 존재할 확률이 1미터 지점에서 가장 높고, 2초 후에는 2미터 지점, 3초 후에는 3미터 지점에 존재할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에 물체가 초속 1미터의 속력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 있던 물체가 사라지고 다음 위치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눈에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이동한 것만 보이는 것이다. 물체의 운동이란 물체가 실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生)과 멸(滅)이 시공간 상에서 변하는 현상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산골짜기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굽이쳐 흐르기도 하고 소용돌이치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은 멈춤이 없이 계속 흘러만 가는데 이 굽이치는 형태와 소용돌이는 같은 지점에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소용돌이는 진짜일까? 소용돌이를 만드는 물은 흘러가버렸어도 소용돌이는 흘러가지도 않고 그 모양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내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이 소용돌이는 실체일까? 아니면 착시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분명 소용돌이라는 실체는 없다. 물이라는 실체가 있을 뿐이고 이 물이 만들어내는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삼라만상도 이 소용돌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저 돌멩이도 돌멩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과 같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그 무엇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는 아닐까? 이런 생각은 불교나 신비주의 사상에서나 있을 법하지만 과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과학에서는 사물의 존재는 확실한 것이고 이보다 더 확실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특히 양자역학에서는 오히려 이 불교적인 생각과 상당히 가까운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본 것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가 사과를 본다는 것은 사과에서 나오거나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가서 망막에 거꾸로 된 상이 맺힌다. 이 상이 망막 세포에 주는 자극이 시신경을 통해서 뇌에 전달되면 뇌신경 세포들이 이 정보(자극)를 주고받고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 “아, 저기 빨간 사과가 있다”이다. 이 결론에 따라 우리는 저기에 사과가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망막에 맺힌 것이 사과가 아니다. 사과에서 나온 빛일 뿐이다. 뇌가 분석하는 것도 사과가 아니다. 사과에서 나온 빛도 아니다. 망막의 자극이 만들어내는 전기적 신호일 뿐이다. 저기에 사과가 있다고 느끼는 행위는 이 전기적 신호를 분석해서 내린 결론일 뿐이다. 이 결론이 정말 사과라고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저기 있는 사과와 같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삼라만상은 네온사인처럼 생과 멸이 반복되면서 만들어내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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