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7.08.29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노을이 산 능선에 곱게 드리웠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가지들은 초록물결이 흐르는 듯하다. 아이들은 이불 위에 배를 깔고 만화책 삼매경에 빠지고 남편도 무협지를 챙겨들고 자동차로 나가버렸다. 엄마도 휴양림 이곳저곳을 산책하느라 고단하셨나 보다. 자리에 눕더니 이내 코를 고신다. 검은 머리 한 올 없는 새하얀 머리와 주름진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언제 저렇게 백발이 되었을까. 주름살은 왜 그리 많고 골이 깊은지 자꾸만 눈두덩이 뜨거워진다. 아마도 엄마의 주름살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이력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리라.

우리 가족은 매년 집에서 가까운 휴양림으로 여름휴가를 간다. 짧은 일정 오가며 길에다 시간을 낭비하기도 아쉽지만 무엇보다 가까이 사시는 엄마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픈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매번 함께 삼겹살만 구워 드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엄마가 올해는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다고 한다. 혹시나 결정을 번복할까 빨리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어스름 어둠이 짙어지며 노을이 지고 가로등 불빛만이 숲 속 휴양림을 밝히고 있다.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숲 속을 한층 더 평화롭게 한다. 나도 만화책 한 권을 펴들고 엄마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이렇게 엄마와 내가, 그리고 내 딸들과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온전하게 함께 보내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오늘 하루도 엄마의 주름살에 담길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간절한 기도를 신들이 외면하지 않았나 보다.

몇 해 전 엄마는 큰 수술을 받았다. 대장에 종양이 발견되어 노령임에도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찍 엄마를 병원에 모시지 못한 것을 가슴 치며 후회했다. 내내 목욕을 모시고 다니면서 엄마의 체중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힘들게 일을 하셔서 그런 줄만 알았다.

가족들은 엄마에게 차마 암이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담당의사와 간호사마저 공범으로 만들어 담석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간 후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눈물로 매달렸다. 엄마와 이별할 준비도 생각도 해본 적이 없으니 더도 말고 제발 3년만 더 우리 곁에 머물게 해달라고. 다행히 수술과 치료를 잘 견뎌낸 엄마는 3년보다 더 긴 시간을 무탈하게 보내고 내 곁에서 우리 딸들과 나란히 누워 주무시고 계신다.

내가 기도로 유예한 3년은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간절함이었다. 결혼하고 한 번도 평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자책감도 컸다.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 막내딸이 잘사는 모습을 꼭 보여 드리고 싶었다.

집 한 칸도 없고 빚만 있다고 늘 속을 태우셨는데 그동안 우리는 번듯한 집도 장만하고 엄마가 애면글면 걱정하던 빚도 다 갚았다. 아이들도 제 몫을 하도록 잘 키웠다. 무엇보다 늘 일에 묻혀 살던 우리 부부가 가끔 여행을 하기도 하고 엄마를 모시고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많이 곤하셨나 보다. 낮게 코를 고시는 모습이 평화롭다. 오늘 밤 엄마의 코 고는 소리는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