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괴산의 인물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의 어래산 유래
역사속의 괴산의 인물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의 어래산 유래
  • 김홍숙<괴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08.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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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군의 역사적 변천사를 보면 고구려 잉근내군, 신라 괴양군, 고려 괴주군, 조선 태종 13년 이후 괴산군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로부터 충·효·예를 근본으로 충신, 효자, 열녀와 역사·문화 등 큰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풍부한 수자원과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자랑하는 산자수려한 인걸의 고장이다.

먼저 근대 이전의 인물과 조선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가와, 근대와 현대인물 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이전의 인물로 배극렴(裵克廉 1325고려충숙왕12~1392조선태조1)은 고려 말 조선 초기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자는 양가, 호는 필암 본관은 성주이다.

조부는 배경신이며 부친은 배현보이다. 모친은 성주 이씨로 이천년의 딸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의 수령, 상주목사, 계림윤, 화렬윤, 합포진첨사 등 외직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에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고을의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 주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곳의 하천과 땅을 배천, 배야라고 불렀다고 한다.

1376년 진주도원수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에서 크게 물리치고 이듬해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어 왜구의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때 창원 인근의 합포에 왜구 방어를 위한 성을 쌓아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 번성의 기초를 다졌다. 1378년에는 욕지도에 침입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에는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하여 사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진주, 반성현, 울주, 청도, 사주전투 등에서 활약하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여 1380년 밀직부사에 올랐다. 이후 1388년 요동출병 때 조전원수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수인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도왔다. 이러한 공으로 판개성부사의 요직을 맡았다. 문하찬성사로 승진하고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에는 회군공신에 추록되고 양광도찰리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개경의 내성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았으며 문하우시중으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참여하였다.

조선 창업의 공으로 익대보조공신문하좌시중 성산백로로 봉해져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이 되었다. 이후 세자 책봉에 관여하여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였는데 이로 인해 후에 태종에 의하여 폄하되기도 하였다.

만년에 물러나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어래산 밑에 살았는데 태조가 친히 그를 찾아 세 차례나 방문하여 산 이름이 임금이 오신 산이라 하여 어래산(御來山), 마을 이름이 세 번 방문하였다 하여 삼방리(三訪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1392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상사를 주관하였다.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배극렴의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송산 3리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 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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