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와 광주
‘미라이’와 광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7.08.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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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의 한 촌락에 일단의 미군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미 23사단 11여단 20연대 1대대 찰리중대 1소대원 27명이다. 당시 미군은 베트콩의 구정대공세로 대사관까지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고 약이 바짝 오른 터였다. 대대적인 반격전을 전개하면서 베트콩이 점령했다가 후퇴한 지역을 베트콩 동조지대로 찍고 표적으로 삼았다. 명령은 무자비했고 하위부대로 가면서 더 살벌해졌다. 연대장은 “다시는 베트콩이 마을을 거점화 할 수 없도록 초토화하라”고 명령했고, 대대장은 “가옥을 태우고 우물을 폐쇄하고 가축까지 없애라”고 받은 명령을 구체화해 하달했다. 중대장은 “민간인도 베트콩으로 의심되면 처단하라“고 살을 붙였고, 소대장은 모든 주민을 용의자로 간주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잖아도 찰리중대는 얼마 전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으로 동료들을 잃은 터라 병사들의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베트남전 최악의 참극이자 미군의 치욕으로 꼽히는 미라이 마을 양민학살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들어선 미군들은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은 후 총격을 퍼부었다. 도망가는 주민들은 사냥하듯 추격해 사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살육전이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벌어졌다. 나중에 나온 미군의 조사보고서에는 한 병사가 어린이를 겨냥해 쏜 총알이 빗나가자 동료들이 박장대소하며 비웃는 장면도 나온다. 이틀간 미라이 마을과 인근 마을에서 같은 방식으로 민간인 504명이 학살됐다. 어린이가 56명, 여성이 182명이었다. 마을에선 단 한 점의 무기도, 주민들이 베트콩에 부역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 공개된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1980년 기밀문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당시의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로 적고 있다. 무고한 양민에게 불순한 혐의를 뒤집어씌운 후 무차별 학살한 미라이 사건과 광주사태를 동격으로 본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등 광주의 비극을 초래한 주역들의 베트남전 참전 경력도 언급하며 광주의 군사작전이 베트콩 섬멸작전을 방불했다고 적고 있다.

문서에서는 당시 광주 현장에 근무했던 한국군 내부 정보원의 진술이 눈길을 끈다. 그는 광주사태의 시발점이 됐던 대학생 시위 규모는 처음에 300명 정도에 불과했고, 군인만 보면 도망칠 정도로 기세도 대단찮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다가 군인들이 도망치는 학생들을 붙잡아 구타하고 리더 격인 한 학생을 대검으로 찌르면서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했다고 밝혔다. 쫓기던 학생을 숨겨준 식당 주인이 총에 맞고 군인이 식당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가 민간으로 급속 확대됐다고도 진술했다. 광주 참사가 어떻게 기획·전개됐고 그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폭도들이 무장하고 위협하자 병사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전두환 측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영화 `택시 운전사'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5·18이 최근 재조명을 받고 있다. 당시 군이 공중에서 지상을 공격하는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들을 출격 대기시켰다는 사실이 확인돼 광주 공습까지 계획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신군부 측은 북한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당시 대기했던 조종사들은 “남침에 대비했다면 공중전을 위한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했어야 했다”며 “조종사들도 광주 투입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국이 강력하게 반대해 포기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미군이 5·18 사태를 미라이 학살에 비교한 것은 그만큼 전개과정이 야만적이고 잔혹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미라이의 가해자들은 남의 나라 국민을 학살했지만, 광주의 가해자들은 제 나라 국민을 학살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차이는 미군은 미라이 희생자들이 민간인임을 인정하고 만행을 사과했지만, 5.18을 획책한 당사자들은 사과는커녕 아직도 당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고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등의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특별조사위를 구성해 다음 달부터 5.18 당시 군 헬기의 기총소사와 전투기 출격대기 의혹을 조사하기로 했다. 국방부가 의지를 보였지만 가해 당사자인 군이 제대로 진상을 밝힐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제기되고 있다. 군이 제 살을 도려내서라도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처절한 각오로 조사에 임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번 조사가 군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던 과거의 불명예를 씻고 국민적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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