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오후 6시에 닫고 다음날 6시에 연다고 하자. 문 닫은 12시간 시간 동안 설사 돈이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해도 알 길은 없다. 한 은행원이 이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문을 닫은 후 돈을 인출하여 밤새 그 돈으로 장사해서 돈을 벌고 문 열기 전에 돈을 다시 은행에 입금시켜 놓기로 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 은행원은 자기 돈 한 푼 없이 밤 장사를 해서 매일 돈을 벌고 있었다. 은행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다. 은행이 손해 보는 일은 없으니까.
자연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느님께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나 할까. 원자핵 속에 있는 중성자와 양성자는 서로 자기들끼리 단단히 묶여 있다. 어떻게 묶여 있느냐 하면 소위 중간자라고 하는 입자가 이 소립자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로를 묶어 놓는 것이다. 원자핵 속에는 중간자라는 아교(阿膠) 입자가 수시로 생겨났다가 소멸한다. 그런데 이런 입자가 생겨나는 것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고 하는 에너지보존법칙을 위반한다. 즉, 이 우주의 에너지는 더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에너지보존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연과학에서 절대로 위반할 수 없고, 아직도 그 위반 사례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런데 원자핵 속에서 이 중간자의 생성은 분명히 에너지보존법칙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위반은 하느님에게 들키지 않는 위반이다. 하느님께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느님께 들키지 않는다고? 그렇다. 양자역학에는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이 있다. 에너지와 시간, 운동량과 위치에 관한 정보는 서로 상보적이어서 두 값을 곱하여 어느 양(플랑크 상수, h)보다 작으면 그 양은 측정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다. 물론 이 플랑크 상수는 어마어마하게 작아서 우리가 일상생활 환경에서 하느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자와 같은 작은 공간에서 아주 짧은 시간 속이는 것은 가능하다. 이 중간자라는 매개입자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겼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동안에는 에너지보존법칙을 위반하지만 위반했다는 사실을 관측할 수는 없다. 하느님조차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하느님도 모르는데 물리학자는 어떻게 알았는가? 물론 물리학자들도 그런 소립자를 그 짧은 시간 동안은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이 소립자의 존재를 아는 방법이 있다. 소립자만한 에너지를 인공적으로 원자핵 속에 집어넣어 주고 소립자를 원자핵에서 빼낼 수 있다. 이렇게 빠져나온 소립자는 관측이 가능하다. 에너지 은행을 관장하는 하느님은 그렇게 어리숙한 하느님이 아니다. 철저하게 손해 보지 않는다. 중간자라는 소립자가 마음대로 생겼다 없어졌다 할 수는 있으나 철저하게 하느님이 허용하는 시간과 공간의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 그 범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원자핵에 주입해야 한다. 이 에너지 주입 방법이 입자가속기다. 에너지가 매우 큰 입자를 원자핵에 쏘면 그 에너지에 해당하는 소립자가 만들어진다.
은행원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그 은행원이 은행이 문 닫은 시간 동안 돈을 빼내서 장사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공개 행위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하려면 자기 돈을 은행에 예탁해야 한다. 마치 원자핵 속에서는 입자의 생성 소멸이 자유롭지만 핵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가해야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도 그렇게 융통성 없이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범위 내에서는 하느님도 눈감아 준다. 다만 그 허용범위를 넘으면 절대 안 된다. 인간 사회도 그래야 한다고 한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만 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남이 모르는 것이 있어야 하고, 때때로 작은 잘못은 서로 눈감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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