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
제비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7.08.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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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리운 이가 불쑥 나타난 것처럼 반갑다. 발을 멈추고 숫자를 센다. 어림잡아도 백을 훌쩍 넘어선다. 전깃줄마다 만원이다. 숲 속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지붕과 담장 위에도 앉아있는 간격이 좁다. 잠시도 눈 돌리기 아까운 이 광경을 본다면 흥부보다 놀부의 입이 귀에 걸리겠다. 예고 없는 방문에 사흘째 동네가 소란하다.

비 갠 팔월의 하늘이 높다. 푸름 속으로 밀잠자리 떼가 낮은 자세로 유영할 때마다 제비도 함께 날아오른다. 물 찬 제비다. 청색금속광택이 나는 검은 등과 매끈한 초리가 햇살에 반짝인다. 이마와 멱은 어두운 밤색을 띤 붉은색이다. 멱 밑은 검은색으로 경계를 이루고 몸의 아랫면은 흰색으로 마무리되었다. 날씬한 몸매에 암컷보다 꼬리가 긴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연미복 차림의 수컷이 눈길을 잡는다.

제비는 우리나라의 여름철새다. 삼월 하순쯤 도래해 두 번의 번식을 하고 시월이면 겨울을 나기 위해 대부분 강남이라 부르는 중국 양쯔 강 남쪽으로 떠나는 나그네다. 해마다 봄이면 돌아오던 제비가 어느 해부터 제비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연을 남겨놓고 자취를 감췄다.

희극과 비극 사이, 사랑을 찾아왔다가 다시 돌아가 버리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제비가 그러하고 제비가 돌아올 때쯤 핀다는 제비꽃이 있다. 뒤통수나 앞이마에 뾰족이 내민 머리털을 가리키는 제비초리는 뒤통수는 보기에 따라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앞이마는 손오공 같아 우습다. 은혜 갚는 제비를 주인공으로 한 흥부전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제비이름이 붙여졌다고 다 좋을까. 제비족의 유혹에 빠져본 여자들은 제비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일이다.

제비족이라고 모두가 세련되고 말쑥한 차림새는 아니다. 어느 파렴치한 제비족은 아무리 눈여겨봐도 제비처럼 매끈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투박한 외모에 가방끈도 짧고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지만 사교춤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클럽에서 만난 여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돈을 갈취했으나 처자식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물어다 주는 양식도 없었다. 어느 때는 사기죄로 구속되기도 하고 유부녀를 강제로 데려다 살림을 차려 파탄시킨 가정이 여럿이었다. 그 제비족도 클럽마다 옮겨 다니는 춤판의 나그네였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할아버지가 되어 조금은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그 버릇은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한국전쟁 후, 급격한 성장을 이룬 칠팔십 년대에 경제관련 유행어로 제비족이란 이름을 포함시킨 장본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는다. 요즘은 클럽의 제비족은 잠잠해지고 등산제비족과 인터넷제비족이 뜨고 있다니 제비족도 시대 따라 변천하는가 보다.

저녁나절 동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제비무리가 떠났다. 한 마리도 없다. 어디로 갔을까. 석양을 배경으로 잠자리 떼만 공중을 맴돈다. 제비의 방문은 돌아올 기약 없이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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