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 인간에게만 있는?
생명윤리. 인간에게만 있는?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8.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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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또다시 닭이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들어 서너 차례 이상 `닭'에 대한 글을 쓴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재까지 나아지거나 고쳐진 것이 별로 없다.

살충제 달걀이 엉뚱하게도 현 정부 탓으로 공격되거나, 식품의약품안전처 수장의 능력과 적합성에 대한 의심으로 비화하고 있으니, 닭이 인간 세상을 상대로 키우고 있는 불신과 적폐가 만만치 않다.

인간들은 살충제 달걀 사태를 존엄하기 그지없는 인간생명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으로 여기고 있다. 오죽하면 정부가 먹거리를 갖고 하는 나쁜 짓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발끈하겠는가.

과정이나 원인을 따져보거나 살필 것도 없이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에게는 오로지 평화롭고 건강하며 안전한 음식물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명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작가 황선미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 무려 220만명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는 경이적인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일은 불과 6년 전의 일이다.

운신조차 할 수 없는 케이지에 갇혀 지내던 그때 그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의 간절한 소망은 자유와 종족 보존이다. 그야말로 생명을 가진 것들에 극히 본능에 해당하는 것을, 인간은 그나마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이를 만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작가는,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암탉 `잎싹이'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인간은 그저 거기에 담긴 얄팍한 `재미'만을 취한 채 기본적인 윤리는 무시하고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닭은, 그리고 활동이 가능한 모든 생명체는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모래목욕도 하고, 서로 몸을 보듬기도 하면서 자생과 자정 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육식에 대한 탐욕과 무조건 많은 양의 달걀과 고기를 얻으면 그만이라는 비윤리는 결국 동물은 물론 인간에게도 타인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존중을 무시하게 되고 말 것이다.

옴짝달싹 조차할 수 없는 틀 안에서 키운 닭에게 동물복지이거나 생명윤리 같은 거창한 구호는 어지럽다.

그리고 부화되거나 품을 수 없는 달걀을 즐겨 먹는 인간들에게 배려나 더불어 삶, 또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다.

케이지 사육, 즉 프레임에 갇힌 먹거리가 인간의 사고 역시 틀 안에 가두고 마는 결과를 만들고 말 것이라는 것은 살충제 달걀을 통해 인간이 (닭을 매개로) 인간에게 경고하는 엉뚱함이다.

미국의 인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복잡한 현상을 설명할 때 이용하는 핵심적 은유에 인간 개인의 삶은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이른바 프레임 이론을 주창한 것인데, 프레임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과정이며, 이성보다는 감정, 마음과 관련돼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방식을 고집하며 세상을 대하는 틀에 갇히거나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생명윤리는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상정되고 인식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인간들에게는 이미 무의식의 세계로 분률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무의식적 습관으로 먹어치우고 마는 달걀은 닭들에게는 고통이다. 닭에게는, 모든 육식의 대상에게는 자유는 고사하고 대를 이을 알을 품거나, 품어도 새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단절이 있고, 생명윤리는 당연히 없으며 수명조차 인간에 의해 제멋대로 단정되는 도구에 그칠 뿐이다.

육식에 매몰된 인간은 풍요로운 결실의 기쁨 대신 탐욕과 무의식과 비윤리, 그리고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생명의 일회성, 그 모든 수단을 먹어치우는 셈이다.

그럼에도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알알이 익어가고 있고, 가을은 벌써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발산리 들판에 새벽닭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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