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 비
비, 비, 비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7.08.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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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24층에서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 깊고 푸르다. 눈에 보이는 청명한 하늘은 선선한 가을 날씨 같고, 피부로 느끼는 기온은 찌는 듯 무더운 여름 날씨이다.

어쩌면 이렇듯 시각과 촉각이 다를까. 비가 내린 후라 멀리까지 청주 시내가 훤히 드러나고, 산마루 성곽 길도 그려진다. 짙푸른 하늘과 도시는 마치 푸른 바다가 도시를 삼키는 듯한 형상이랄까. 순간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도시가 물속에 잠기는 상상은 정녕코 몸서리가 쳐진다.

인간은 참으로 망각의 동물이다.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몸의 기억을 잊은 채 서정이 눈앞을 가리는가. 눈앞에 닥쳤던 어마어마한 수재를 어찌 잊으랴. 시간당 90㎜가 넘는 폭우가 가옥과 공장을, 자동차와 사람을 순식간에 삼켜버린 것이다.

물바다가 되어가는 도시를 그저 바라보며 비가 그쳐 주길 바란 미욱한 인간이다. 하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비손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시간여 만에 직장 잔디구장이 물에 잠기고, 도로에서 역류된 물이 흘러 인도는 종아리까지 차오른다.

창고에 원단과 원료가 물에 잠길까 비상발령으로 직원들을 불러내 제품을 옮기던 그날의 긴박한 심경을 어찌 말로 다하랴.

우리 고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도민을 돕고자 직장의 인원을 꾸려 인력지원을 나선다. 수해 피해가 심한 낭성면 소재 전원주택 두 채이다. 우리가 찾아간 주택은 산에서 쏟아져 내린 토사가 덮친 가옥이다. 정녕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상황이리라. 가옥과 일 미터 남짓하게 닿은 산이 문제이다. 바로 뒷산이 물길이 되어 그림 같은 집을 덮친 격이다. 산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였더라면, 적어도 이런 상황은 맞지 않았으리라.

사람이 살 수 없는 가옥이다. 부엌 유리를 산산이 깨트리고 쏟아져 내린 토사는 거실과 안방, 작은 방을 덮쳐 아수라장이다.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선 거실장과 장롱, 책장 등 진흙에 잠긴 가구를 해체하여 버려달라는 주인의 말이다. 그다음에 방바닥에 덮은 부엽토, 냄새가 진동하는 시커먼 진흙을 쓰레받기로 퍼서 버리는 일. 장판을 걷어내고 방바닥에 물을 뿌려 흙물을 수없이 퍼낸다. 그리고 젖은 바닥을 준비해 간 걸레로 무수히 닦아낸다. 마당은 삽질로 집안은 걸레질로 마무리하고 온몸이 땀범벅으로 흙투성이가 되어 귀가한다.

폭우의 힘을 온몸으로 절감한 날이다. 한동안 비에 관한 감수성을 지우고 싶다. 지상에 쏟아낸 빗물은 모든 걸 순간에 삼키고 부수고 깨트리며, 도시를 마비시킨 것이다. 물에 잠긴 문명은 다시 사용할 수 없는 흉물로 쓰레기 더미로 버려진다. 하지만, 재앙을 일으킨 물은 우리의 생명수이기도 하다. 수재민과 이재민에게 가장 먼저 보내온 물품이 물이 아니던가. 하늘을 향하여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던 빗물은, 얼마 전 가뭄에 목말라하며 찾았던 물이다. 인간의 목숨을 살릴 수도, 생명을 가져갈 수도 있는 물. 무엇보다 수해복구 현장에서 깨달은 건, 수재를 입은 피해는 물로 닦아내야 한다는 아이러니다. 인간의 안일한 태도와 망각에 경각심을 준 물은 인간에게 어찌할 수 없는 필요악이다.

비, 비. 비. 비 맞는 쾌락과 센티멘털리즘은 당분간 보류다. 그날의 긴박했던 순간과 온몸으로 겪은 쓰라린 감각과 기억을 지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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