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상추를 먹는다
오늘은 상추를 먹는다
  • 임형묵<수필가>
  • 승인 2017.08.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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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임형묵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 외에도 입맛까지 잃는다. 그저 여름을 나기 위해 먹는다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밥상에 놓인 한 움큼의 푸성귀를 떠올린다. 상추 한 잎 집어들면 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손바닥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촉감과 밥 한 수저 얹고 쌈장 살짝 울려 입에 밀어 넣을 때의 씹히는 질감과 입 안 가득 번지는 쌉싸래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있으면 잃었던 입맛이 돌아온다.

땅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한 뼘의 땅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내 손으로 이것저것 가꾸고 일하다 노곤하면 나무 그늘에 벌렁 드러누워 낮잠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었으면 하고. 그러던 참에 주말농장을 분양받았다. 채 20평 남짓이지만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농작물을 가꾸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내가 옆에서 도와가며 응원하니 이것도 행복이지 않은가.

작디작은 땅이지만 씨앗이 발아하고 새순이 돋는 것을 본다는 즐거움에 농부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상추와 쑥갓 종자를 붓고 배추 묘를 심는 작은 농사지만 거실에서 꽃을 피우는 난이나 선인장보다도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것들을 가꾸는 재미로 마음에 꽃이 피니 밭은 꽃밭이다. 토마토가 붉어지고 고추가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슴 속에 꽃냄새가 배니 토마토도 꽃이고 고추도 꽃이다. 밭둑에서 자라는 잡풀도 꽃이다.

그러나 농부의 마음과 달리 농작물은 자라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자라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 토마토 이파리가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토마토가 열리기는커녕 축 늘어져 있다. 건실한 줄기마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토마토만 그런 증세를 보이는 게 아니다. 고추도 이파리가 시들시들하다.

어떤 것은 아예 대까지 말라 들어가는 것도 있다. 밭에 역병이라도 돌았으면 모를까 맛이 맵기로 소문난 고추마저 맥을 못 춘다. 날이 무더워 그런가.

고추가 붉게 익을 때면 그해 여름 농촌 들녘이 생각난다. 내 가슴에도 살살 불기운이 올라오던 여름, 대학에 갓 들어가 처음 맞는 여름방학 때였다. 그 뜨거운 밭에서 어머니를 대신해 이틀에 걸쳐 고추를 따야만 했다. 고추 섶이 무성한데다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 몇 개 따지 않아도 한 포대를 채울 것만 같았다. 밭 골에 주저앉거나 허리를 구부려가며 한 포대 두 포대 채워 나갔다. 수확량이 많아 이틀 동안 꼬박 고추를 따다 보니 오금이 저리고 허리까지 아파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비료 포대에 따 담은 고추를 옮길 힘도 부족해 포대를 땅에 질질 끌다시피 해 고추를 밭둑까지 옮기기도 했다.

그때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라고 절감했다.

가까이 두고 기른 자식을 보면 얼굴에서 기름기가 좔좔 흐르듯 농작물도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 커가는 사실을 실감했다.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전에 이것저것 경험 삼아 해보고 있는데, 어쩌자고 그 뜨거웠던 시간이 떠오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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