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백리 하다기에
일해백리 하다기에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7.08.1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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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수필가>

내게 접으로 마늘 까는 일은 도 닦는 심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반복의 무미건조함 때문이다.

마늘장아찌를 담가보려고 작정하고 여러 접을 샀다. 염치불구하고 어머님께로 들고 갔더니 심심한데 잘되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오롯이 마음을 두고 하신다. 반강제로 일손을 놓게 되신 어머니는 마늘 까는 일에 온 마음을 두고 조곤조곤 즐기듯 하신다. 나는 천방지축 뛰는 망둥이라면 어머니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 심화를 평정한 연어의 모습이다.

지루함을 비켜가려고 장난을 해보았다. 막 캐낸 마늘이라 물기를 머금은 껍질이 두툼하다. 한 겹을 벗겨보았더니 외압을 견뎌낸 겉옷은 결이 굵은 삼베옷 같다. 또 한 겹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조 띤 비단옷이 드러난다. 대여섯 겹 무리 없이 걸쳐 입은 옷을 다 벗겼더니 알맹이가 오종종 머리를 맞대고 있다. 희한도 해라, 보석이라도 되는 양 한 알 한 알 비단보에 옹차게 싸여 있다.

억지로 할 때는 칼을 들이대고 몰강스럽게 굴었는데 한번 보자고 하였더니 투명한 휘장 속에 달빛 반달이 들어 있다. 마고자에 달린 미색 옥 단추다. 달은 어둠을 여는 열쇠, 옥 단추는 폭풍을 삼킨 사내의 가슴을 매듭짓는 고졸한 문지기, 겹겹 비단에 싸인 마늘은 비밀의 문을 나와 우둔한 곰을 환탈하게 하였지.

마늘각시는 왜 열두 대문을 닫아걸고 비밀도 아닌 것이 비밀에 싸여 있을까. 본질은 내밀한 방보다 더 깊이 감춰져 있는 법, 가아假我의 껍데기를 수백 겹 벗겨나가다 드디어 `나'를 만난 웅녀의 수수께끼 명답이다.

속인의 물듦에서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도 나도 찾기 어려운 구중궁궐 속에 숨어 있는 환심장할 진아眞我의 자태이다.

결국 어머니의 진득하니 여문 손끝으로 마무리하셨다. 우접은 인내로 거듭난 웅녀가 단군조선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시집 온 후 지켜본 우리 어머니도 그 피를 받아 숙명이 되어 사셨다. 어머니만이랴 고조선 이래 그 피를 받은 모든 여인들은 고스란히 삼동 같은 인고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뽀득뽀득 씻어 건져놓으니 또 봐도 반달이요 옥 단추다. 항아리에 담고 간장과 설탕과 식초를 부었더니 밤바다에 동동 뜨는 뽀얀 반달이다. 사부자기 떠올라 어둔 밤을 열어젖히고 해발쭉 웃는 반달 저 어여쁨이라니?. 소싯적에 보아 온 고향 달을 닮았다.

불잉걸 같은 가슴을 삭여주던 달이 지금은 어쩐지 달빛조차 잉걸을 품고 떠오른다. 아니, 내가 본 달은 인공 불빛에 바래어버린 도심의 서글픈 달빛이다. 산골 달은 지금도 어둠을 열어 소소炤炤하고 정겹기 그지없을 것이다.

저 농도 짙은 묘약이 마늘의 사나운 냄새를 가라앉히고 덤으로 화급한 성질까지 잡아 순한 심성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겁 없이 몇 톨 집어 먹어도 탈이 없는 평이해진 맛이 내 몸의 전쟁을 평정한다니 믿어보련다. 마늘의 일해백리一害百利 중에 한 가지 흠을 없애는 과정이다. `누가 아랴-' 마늘의 약성으로 기름진 육신뿐만 아니라 수양이 덜 된 내 소갈머리까지도 알토란같이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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