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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하는 말

금요칼럼 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l승인2017.08.11l수정2017.08.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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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정년을 하면서 고향에 집을 지어놓고 가끔씩 내려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늙어서 망하는 가장 빠른 길이 별장을 갖는 것과 애인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둘 다 없어도 될 것을 덤으로 갖는 것이고, 둘 다 유지 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어느 시인에게 했더니 그 시인이 낼름, “둘 다 많이 만져 주어야 한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일 년여 고향 집을 관리하면서 이제 이 말이 실감이 난다. 잔디에 난 풀 뽑으랴, 화단 가꾸랴, 이곳저곳 손질하랴, 참 손이 많이 간다. 손만 가는 게 아니라 돈도 많이 든다. 애인 아닌 애인 둔 죄로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별장은 애인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쩌면 침묵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다. 내가 고향집에 가면 먼저 집이 하는 침묵의 말을 듣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집이 하는 침묵의 말을 세심히 듣는다. 이 침묵의 말을 다 듣고 나면 나는 먼지는 털어내고 때는 벗겨 낸다. 상처는 꿰매고 헌 옷은 갈아입힌다. 그리고 한 바퀴 휘둘러본다. 집은 말이 없지만 침묵으로 나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인간이 그렇게 닮기를 바라는 이 대자연은 어떤가? 대자연이 말을 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인간은 이 대자연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자연과학은 바로 이 대자연이 하는 말을 해석하는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로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많이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일기예보를 하고, 별의 운행을 예측하고, 식물의 품종을 개량하고, 이런 모든 과학적인 성과는 자연이 하는 침묵의 말을 알아들은 덕분이다.

자연만 침묵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어떤가? 하느님이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있던가? 하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있고, 심지어는 눈으로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음성이 정말 공기의 진동인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본 것이 햇빛과 같은 빛을 통해서 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되었건 결국 사람이 쓴 글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렇게 믿는 것이지 하느님이 그렇다고 말을 한 적은 없다. 대자연이 말을 하지 않듯이 하느님도 말을 하지 않는다.

절에 가면 부처님을 만난다. 하지만 금칠 속에 갇힌 부처님이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처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감사하고, 작심을 하며, 기쁜 마음으로 대웅전을 빠져나온다.

부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재벌이고 너나 할 것 없이 범종에, 석상에 자기 이름을 새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등에, 기왓장에 자기 이름, 자기 아들딸의 이름, 자기 애인의 이름을 쓴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우리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보다는 그 말과 말 사이에 있는 침묵에 더 집중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아직 말이 미치지 못한 공간에 있는 침묵이다.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존재하지 못한다. 음악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어디 소리만으로 아름다울까?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소리를 소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리만 있다면 음악도 없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음악을 만들듯이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과 말 사이의 침묵에 집중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말보다 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옛 시인의 말이 새삼 가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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