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바보다
난 바보다
  • 김희숙<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수필가>
  • 승인 2017.08.0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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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김희숙

어둠이 소리 없이 채색된 마당에 앉아 생각에 젖었다. 검은 도화지 같은 하늘엔 누군가 침을 발라 구멍을 뚫은 듯 여기저기 별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묵념하듯 떠 있는 달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바보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다. 밤하늘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난 바보다. 난 바보처럼 살았다. 그래서 바보같이 맘은 편하다.”

오늘은 휴일이다. 아침을 먹고 신발을 찾으러 텐디 매장에 들렀다. 변화를 싫어하는 나는 구두도 십 년 가까이 같은 디자인을 신어왔다. 석 달 전, 신발 매장 직원에게 신발을 주문해 놓고 집으로 왔었다. 그동안 신어 왔던 구두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똑같은 디자인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단종된 디자인이라 청주 매장엔 제고가 없고, 부산 매장에 하나 부천 매장에 하나 있다고 했다. 구해서 집으로 보내준다는 직원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값을 치르고 왔다. 일주 후 구두가 도착했다. 신던 신발이 낡기는 했지만 못 신을 정도는 아니라, 찾아온 새 신은 신어보지도 않고 신발장에 넣어놓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어제로 흘렀다.

며칠 전 아침이었다. 컨설팅 장학을 나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후줄근한 신발보다는 발에 익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새 신을 신고 싶었다. 지각할세라 얼른 새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웬일인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채 가지도 않았는데 신발이 자꾸 벗겨졌다. 신고 갔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았다. 다시 원래 자리에 넣고 헌 신발을 꺼내 신고 출근을 서둘렀다.

다음날 신발을 들고 매장에 갔다. “왜 이리 헐렁이는 지 모르겠네요?”하자 직원은 내 주문 정보를 조회해 보더니 230짜리가 갔다고 한다. 난 225를 신는데 직원이 실수한 것 같다고 했다. 다른 것으로 교환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그 싸이즈는 다 빠져서 전국 어느 매장에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 오래돼서 환불도 힘들다고 했다. 순간, 박박 우겨서 환불받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훅 불었다. 그러나 애초에 확인해보지 않은 내 잘못도 있고, 또 내 생각만 하고 우긴다면 실수한 직원 입장도 난처해 질 것 같아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요?”하자 직원이 앞쪽에 깔창을 깔아 주겠다고 했다. 신을 맡기고 빈 몸으로 돌아서 왔다.

그리고 오늘, 주말 농장에 가기 직전 남편과 매장에 갔다. 가는 도중 그간 사연을 말하자 그는 나보고 참 바보같이 산다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환불을 받아야지 왜 불편하게 큰 신발을 신느냐며 짜증을 냈다. 나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 같지는 않았다. 물론 꼭 맞는 신발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미 그런 신발은 없다고 하고, 깔창을 깔아서 신으면 아쉬운 대로 신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보이면 자꾸 화재가 그쪽으로 갈까 봐 찾아온 구두를 트렁크 안에 넣고 주말 농장을 향했다. 일주일 만에 도착한 밭에는 풀이 한자나 자라 있었다. 풀을 뽑고 물을 주고 나니 어느새 산그늘이 마당 가득 내려와 있었다. 산그늘을 밟으며 몰래 차 뒤편으로 갔다. 그가 한 소리 할까 봐 신어 보지도 않고 찾아온 신발을 그제 서야 트렁크에서 꺼내 신어 보았다. 그럭저럭 신을 만했다. 그의 기척이 들렸다. 얼른 신발을 트렁크 안에 넣고 밤하늘을 보는 척하며 혼자 지껄였다. 난 맘 편한 바보로 살거야라고. 그런 모습이 애잔한 듯, 훈풍이 손을 내밀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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