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밀도
생각의 밀도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8.0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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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바둑을 두어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아마추어는 한쪽 말을 살리느라 신경을 쓰다 보면 어느 사이에 반대편 말이 죽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프로기사는 다르다. 프로기사는 매 순간 바둑판 전체를 다 보고 있다. 그래서 한쪽 말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말이 죽는 걸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추어에게는 바둑판이 너무 커서 한눈에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프로기사에게 바둑판은 아주 작아서 한눈에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바둑판이 아마냐 프로냐에 따라 왜 이렇게 달라진단 말인가?

이와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축구 선수가, 경기가 잘 풀릴 때는 상대방 골문이 매우 넓어 보이지만 잘 안될 때는 골문에 상대방 키퍼가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키퍼의 입장에서는 이와 반대로 잘 될 때는 골문이 작게 느껴지고, 잘 안될 때는 골문이 엄청 넓어 보인다고 한다.

용의 입속에 여의주를 조각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생긴다고 한다. 전문가는 용의 아가리가 넓은 동굴 같이 보이지만, 초보자에게는 아가리가 바늘구멍처럼 좁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는 힘들이지 않고 조각칼을 마음대로 놀리고, 초보자는 좁아서 칼을 움직일 틈도 없어 진땀을 흘리게 된다.

나는 이런 현상을 `생각의 밀도'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우리 두뇌는 수련을 많이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정보처리 능력이 달라진다. 수련을 많이 하면 단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바둑판에서 오는 정보를 프로기사는 단시간에 많이 처리하기 때문에 그 많은 정보들이 밀집되어 나타난다. 바둑판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정보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둑판이 작게 보이는 이유다. 조각가도 수련을 많이 하게 되면 작은 공간과 관련된 정보들의 양이 많기 때문에 작은 공간이 크게 보이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공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가지 수가 많아진다. 이것이 공간이 크게 보이는 이유다. 사람이 인식하는 공간의 크기란 그 공간에서 오는 정보의 양과 질, 정보의 배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생각의 밀도는 공간의 크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길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기의 순간이나 죽음에 임박해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심지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그 몇 초라는 짧은 순간에도 자기 과거의 거의 전부가 영화화면처럼 지나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될까? 뇌의 신경세포들은 평상시에는 느리게 작동하다가 위기의 순간에 엄청난 정보처리를 하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란 처리되는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

시간과 공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의 관념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고 관념적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가공적 개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크기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두뇌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같은 시간과 공간이라도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길게도 짧게도, 크게도 작게도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느껴지는 시간, 느껴지는 공간 외에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전장의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체험을 자랑삼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모두 생각의 문제다. 우리 조상들의 말이 헛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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