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꼬리
어머니의 꼬리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8.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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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남(男)과 여(女)가 만나서 찌릿 전기가 통하다. 청주손(孫)가의 총각과 전주이(李)가의 처녀가 사랑에 빠지다. 그리하여 둘은 부부가 된다. 그들은 사랑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돈이 헐크가 되어 서로를 할퀴게 될 줄 까마득히 몰랐다.

무일푼으로 시작된 살림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내 집을 마련하기까지 고달팠다. 그 시간은 얼굴에 흐린 날의 안개처럼 뿌연 그늘을 드리웠다. 안개는 사랑으로도 걷히지 않고 시야를 흐리게 했다. 종종걸음을 쳐온 길이 돌아보면 제자리걸음이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는데도 나아가지지 않는 현실 앞에 허탈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꼬리가 생겼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으로 커지는 걱정의 꼬리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허사인 것 같아 자꾸 주저앉으려는 나에게 엄마라는 자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가 있었다. 나를 온전히 의지하며 엄마라고 부르는 단 한 사람. 아들이었다. 내가 우유를 주어야만 배가 고프지 않고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어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아들이다. 나로 하여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음을 알았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딪혀도 상처를 받지 않고 넘어져도 일어서야 하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힘들어도 안 힘든 척,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 녀석에게 꼬리를 내보여 불안하고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다 괜찮다 하던 그 척의 꼬리를 나는 밤이 되어 혼자가 되었을 시간에 내려놓곤 했다.

어느 날은 울음이 되기도 하고, 하염없는 신세 한탄의 한숨이 되기도 했다. 아침이 오면 다시 꼬리를 올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꼬리는 길었나 보았다. 항상 뒤로 잘 숨겨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줄 알았다. 설마 나의 꼬리가 발각되었을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에 아들이 말해주어서 알았다. 아홉 살 무렵에 소피가 마려워 일어났다고 한다.

내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다는 것이다. 자신도 슬펐다고 했다. 그런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아들은 나의 꼬리를 알고도 오랫동안 모른 척을 했다. 나의 들통으로 아들에게 부담을 준 셈이다. 나는 그걸 전혀 몰랐다. 오히려 아들의 꼬리를 감쪽같이 눈치 채지 못한 어리석은 엄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 철이 든 것을 몰랐다.

어머니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픈가. 나보다도 몇 배 더 힘들었을 텐데 표를 낸 적이 없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끝내 그 꼬리를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완벽한 연기인가. 사남매를 위한 희생을 안으로 감내하셨던 어머니의 꼬리가 측은해 온다.

올해 초에 저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힘들고 고되었을 긴 꼬리가 이제야 선명히 보인다. 여자로서의 삶은 전혀 없는 어머니로서의 삶만을 살다 가신 한 사람의 생을 위안하고 싶어진다. 좋은 화장품과 예쁜 옷을 왜 입고 싶지 않았으랴. 또 자식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것도 수없이 많았으리라. 외국여행을 한 번도 보내드리지 못해 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다.

어머니. 한 여자로서의 삶을 동정한다. 한 어머니로서의 생을 존경한다. 나에게 최고의 어머니였음을 말하고 싶다. 굼뜬 딸은 뒤늦은 찬사를 지금에서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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