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또 다른 말 `유기'
소유의 또 다른 말 `유기'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7.08.0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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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비 내리는 하늘엔 작은 새들의 날갯짓이 부산하다. 방향을 잃은 듯 이리저리 무리져 나는 참새 떼만이 세상을 배회한다.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초록식물들의 모습은 묵언의 정진 중인 수도승 같다. 더위와 장마는 여름의 행간들을 채우고 도로와 바다, 계곡은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두어 달 전 우리 집 길냥이가 새끼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발코니가 소란하다. 그런데 시끄러운 것은 우리 집 고양이들 탓만은 아니다. 물론 새끼고양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시끄러운 것도 있지만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던 낯선 고양이 한 마리 때문으로 보인다.

수고양인 이 녀석 동가숙서가식하며 지냈던 모양인데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눈도 순하고 털도 정리가 잘돼 있다. 밥을 주는 나를 그리 멀리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곁을 내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혹여 그 녀석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요즘 가까워지려 목하 고민 중이다.

일 년 전쯤 우리 집과 밭 사이에 둔 이층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이름은 `다람쥐', 녀석의 주인인 듯 보이는 부부는 매일 털도 잘 쓰다듬어 주고 산책도 종종 시키곤 했다.

어느 날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 앞에는 누군가 이사를 갔는지 버리고 간 해진 가구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집 남자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은 것은 며칠 후였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다람쥐'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데리고는 갔을까. 그런데 우리 큰 딸아이가 그 집이 이사 가고 얼마 후 `다람쥐'를 보았다고 했다. 그 집 담장에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녀석은 잊혀졌다.

간디는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했다. 요즘 휴가철을 맞아 전국의 산과 바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연뿐만이 아니다. 가족들이 돌아간 자리에 한때는 가족이라 생각했던 반려동물들이 버려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일요일이면 즐겨보는 `동물농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기동물들의 모습은 인간들의 이중성을 증명해 준다. 늙은 부모가 아프면 귀찮아하면서도 반려동물들이 밥을 먹지 않거나 작은 상처라도 나면 곧바로 동물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그만큼 애완동물들에 대한 애착이 깊다는 말일 것이다. 애완동물은 장난감이 아니다. 애견 가게를 지나다 충동구매로 쉽게 사고, 귀찮고 병이 나니 쓰레기 버리듯 몰래 버리는 행위는 동물을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봄만 되면 초등학교 앞에서 보이는 알록달록 염색을 시킨 병아리들은 아이들에게는 작은 생명체가 아닌 그저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버려도 되는 값싼 장난감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사간 병아리는 작은 부주의로 죽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인간의 소유욕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한때는 가족이 되어 사랑을 주고,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반려 동물이었다. 또 외로울 땐 말동무도 되어주던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만 바라보고 세상에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주인에 의해 어느 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버려졌다. 사람이라도 그랬을까. 자신의 가족이라도 그랬을까.

새끼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암고양이에게 오늘도 그 녀석은 집적이고 있다. 그 녀석이 `다람쥐'인지 아닌지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어쩌면 녀석은 이름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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