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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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7.07.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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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창옥

느닷없는 점령이었다. 침입자는 컴퓨터 바탕화면을 차지하고 요지부동이다.

첫 줄에 “당신의 파일들은 모두 암호화되었다”라고 붉은색 영어로 쓰여 있었다. 그들은 교활하고 치밀했다. 작품들을 열어보니 온통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난무했고 파일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다.

전문가에게 노트북을 의뢰했다. 내 노트북을 점령한 침입자의 이름은 `랜섬웨어'였다. 랜셈웨어는 컴퓨터 사용자의 파일을 담보로 금전을 요구하는 악성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사용자의 문서나 중요한 파일을 암호화하여 파일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후 암호를 풀어주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일명 `데이터 인질극'이란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름도 섬뜩한 `데이터 인질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들의 교활함에 소름이 돋았다.

파일 복구는 어렵다고 했다. 설령 복구 방법을 찾는다 해도 침입자가 요구하는 액수가 만만치 않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전문가는 차라리 포맷을 하라고 권유한다. 당장 내일모레 원고도 보내야 하는데 마지막 퇴고 중에 일을 당했으니 난감했다. 바탕화면에 저장한 것도 꽤 여러 편인데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나의 컴퓨터 실력은 컴맹에 가까운 수준이다. 처음 두 딸의 도움을 받아 글을 써서 저장하는 법을 배웠고 메일 보내는 방법을 익혔다. 그러니 늘 더디고 글을 쓸 때면 생각 따로 손이 따로 움직일 때가 잦았다. 이제 겨우 독수리타법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나는 자판과 화면을 교대로 들여다보며 글을 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동안의 작품을 다른 곳에 옮겨 저장해놓은 것이다. 이런 일을 두고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것 일게다. 만약 USB를 노트북에 연결한 상태로 작업했더라면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만약 그동안 써놓은 글을 모두 도둑맞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그들의 요구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백여 편의 수필에는 내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새삼 지켜낼 수 있게 방법을 알려준 작은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다.

수필은 내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게 해주는 길라잡이였다. 비록 풋내가 나고 설익은 작품들 뿐이지만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수필을 배우고 쓰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자신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이는 법을 터득했다. 수필은 내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었다.

포맷한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는데 또다시 데이터 인질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손끝이 떨린다. 부족하지만 한 편 한 편이 새롭게 다가온다. 시아버님과의 추억이 깃든 `도레미 송편'이야기를 읽는데 “막내야”부르시던 아버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친정엄마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먹먹하다. 수필 속에는 우리 아이들이 있고 남편이 있고 세상 이야기가 있었다.

교활한 침입자 덕분에 새롭게 내 글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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