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와 함께한 벽초 가문의 그후 이야기
조선의 역사와 함께한 벽초 가문의 그후 이야기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07.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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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읍 제월리의 임야는 한국 현대사의 산 교육장이다.

벽초의 증조부로 이조 판서를 지낸 홍우길(효문공)의 묘소는 제월리 선산 가장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는 친일파라는 말을 듣는 홍승목(참판)의 묘소가 있고 그 건너편 마을 위쪽으로 언덕에는 애국지사 홍범식(금산군수)의 묘소가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벽초의 계모와 제수(홍성희의 아내)의 무덤도 있다.

벽초가 네 살 때 아버지 홍범식과 결혼한 계모 조씨. 을사늑약 후 자결 순국한 일완 선생의 아내임에도 제수 김씨와 함께 한국 전쟁 때 월북자의 가족이라 하여 우익에게 처형당했다 한다. 흰옷으로 소복한 두 여인을 굵은 밧줄로 묶어 청원군의 어느 산 위에서 떠나보낼 때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벽초의 고모이신 홍정식의 묘소도 이곳에 있는데 남편은 임시정부 시절 국무위원이며 독립운동가인 조완구이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박헌영, 조소앙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벽초는 남한에 돌아가지 않았다. 북한에 남아 월북인사가 된 벽초의 잔류 원인으로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 정부수립 운동을 강행 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월북의 원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한다.

이후 김구, 김창숙 등이 사람을 보내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했지만 벽초는 거절하였다.

북조선에 잔류하던 벽초는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 정치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때 춘원 이광수는 피난 오던 도중에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벽초는 직접 춘원을 찾아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북 강계군에서 15km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춘원은 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벽초 홍명희는 한국전쟁 후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선전성 제1주상을 맡았던 고려인 정상진은 벽초와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 최승희 등을 옹호했다가 소련으로 추방당하였다. 벽초는 일본 유학시절 이광수, 최남선과 조선의 삼재(三材)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문학가였는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소설 창작이다.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라는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임꺽정은 도적에 불과한데 사회주의자인 벽초가 의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등이 모두 존재할 정도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벽초의 손자 홍석중의 말에 따르면 벽초는 “왜놈들이 조선말과 조선정부를 탄압하니까 그것을 살려서 널리 알리려고 임꺽정을 쓴 거였지 소설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명문 풍산 홍씨 가문은 서울 북촌과 전라도에 살다가 괴산 제월리에 선산을 먼저 구입하고 삶의 터전으로 인산리에 와서 300여년 된 고택에 살게 된다.

일완과 벽초, 그리고 기문과 수경, 무경 아우 홍성희의 가족들, 또 홍석중까지 조선 최초의 여류 문장가 혜경궁 홍씨부터 이제까지 우리 문학을 사랑하고 소중한 유산을 남긴 한 가문의 흔적을 남겼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민족의 격동기에 아픔을 몸소 겪고 살다간 인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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