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의 역사가 숨 쉬는 음성 수정산성에 올라
설성의 역사가 숨 쉬는 음성 수정산성에 올라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7.26 18: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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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수정산성은 음성여중 사거리를 지나 오르막길에 있는 수정산 등산 안내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등산로를 따라 15분쯤 걷게 되면 산성을 이곳에 왜 쌓았는지를 알 수 있는 가파른 산길이 곧바로 이어진다. 수정산(396m) 정상부근에 만들어진 산성까지는 넉넉하게 오르면 30분쯤 걸리는데 산성의 둘레는 577m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산성이다.

산 위에 오르면 음성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사이에 펼쳐진 너른 소이의 들이 제법 시원하며, 사계절 어느 때도 좋으나 눈 쌓인 겨울에 성을 찾는 것은 성의 이름인 설성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어 좋다.

성을 쌓는 모양이나 성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초에 쌓인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까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성 서쪽을 따라 걷다 보면 아직도 기와 조각을 볼 수 있는데, 이 성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 도자기 및 기왓조각 등이 찾아진다.

성은 산의 꼭대기에서 음성 쪽은 5m 아래, 비산리 쪽은 20m 정도 아래를 돌아가면서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북쪽과 동쪽은 성벽이 무너져 있고, 오랜 세월 비워둔 성은 토사가 흘러내려 성을 덮고 있어 여간해서는 석축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높은 곳은 7m가 넘으며 대부분은 3m 정도의 높이로 되어 있다.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명확하게 성문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성을 쌓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물을 확보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식량도 중요하지만 식수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 각종 자료에서는 수정산성 내에 우물이 1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찾을 수 없다. 배수시설도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나 확인할 수가 없다. 수정산성은 입지요인으로서는 뛰어나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하고, 넓지 않아 오랫동안 생활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지키는 용도로 사용된 성이라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활용한 전투용 산성으로 보인다.

수정산은 400m가 채 되지 않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주변의 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 역시 이곳이 이 주변에서 이 지역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북쪽으로 가까이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가섭산이 보인다. 가섭산에는 경상도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의 충주 이류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산인 마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충북과 경기도의 경계에 있는 망이산 봉수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우리나라 문화의 특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데 있다. 보면 볼수록 자연이 문화 속에 담겨 있고 문화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문화는 문화를 일구어낸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 선조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우리 문화의 특질도 알 수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적재적소, 알맞은 시기와 적당한 위치가 잘 어울려야 한다. 적절한 자리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묵묵히 후손을 바라보는 수정산성을 오른다. 자연지형을 잘 이용해 가장 적합하게 존재하도록 한 우리 조상의 지혜를 이곳 수정산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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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2017-07-27 18:28:04
친정이 음성읍이라 오랜만에 수정산 글 보니 반갑습니다~~
집에서 나오면 수정산이 정면으로 보였거든요~~어릴 적, 추석 차례 지내면 부모님과 형제들과 수정산에 있는 조상 산소에 꼭 갔었답니다. 수정산 꼭대기는 한번인가 갔던 것 같습니다.
모처럼 고향 향수 떠올린 오후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