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살아있음에 대한 간절함
덩케르크 살아있음에 대한 간절함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7.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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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기차는 노스탤지어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의 기차는 해리포터의 기차와 닮았다.

해리포터의 기차는 마법의 세계로 향하는 상상이고, <덩케르크>의 기차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음을 탄식하는 현실이다.

죽음이 일상이 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던지는 민간인의 “수고했네.”라는 위로. 그리고 “그냥 살아서 돌아온 것뿐인데요?”라는 짙은 의문의 회한과 “그거면 충분해!”라는 비장함은 피안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한가하게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어쩌지 못하는 폭우로 시름에 겨운 고향 땅 청주의 현실은 적어도 그냥 `나'일 수밖에 없는 개인들에겐 전쟁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전쟁이거나 자연재해이거나 목숨은 도처에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은 늘 개인들에게 집중된다.

그러므로 `살아남기'를 향한 간절함은 상상으로 향하는 해리포터의 기차이거나 비로소 전쟁터가 아닌 민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덩케르크>의 기차일지라도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피안의 세계와 다름없다.

전쟁으로 인해 함부로 결정되는 삶과 죽음의 경계와 위협은 늘 그렇듯이 개인으로서의 `나'를 겨냥한다. 그런 `나'는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력 서열의 계층 피라미드에서 항상 밑바닥에 놓여 있다.

자연재해 역시 마찬가지여서 수마는 결코 부자이거나 서열이 높은 지배계층을 교묘하게 피해 나갈 뿐, 궁핍한 개인들에게 시련을 집중시킨다.

영화 <덩케르크>는 전쟁영화다. 2차 대전 초기 33만여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탈출시킨 다이나모 작전을 영화로 만들었다. 역사적 현실이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승리를 찬양하거나 전쟁 영웅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특유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거기에는 바다와 인접한 육지 해안선에서의 절망과 이를 극복하려는 목숨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하늘에서는 연료가 부족해 돌아가는 길이 끊어질 수 있는 극단의 선택이 있다. 바다에서는 폭격으로 인해 군함이 침몰당하는 고난과, `너'를 버리더라도 살아남아 돌아가고 싶은 본능과 더불어 이를 돕기 위한 민간인의 휴머니즘도 있다.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각각의 장소성이 죽음의 위협이 사라지는 평범한 장소로 전이되는 과정은 살아있음과 죽음의 엄청난 차이만큼 사뭇 다른 빛깔로 투사되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다.

잔인하지도 끔찍하지도 않게 묘사되는 흐린 해안에서의 숱한 주검은 전쟁이라는 비극과,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나'만큼은 살아남아 돌아가기를 간구하는 인간의 본능과 극도로 대비된다.

죽음과 부상의 고통일지라도 다른 `너'보다 먼저 돌아가야 한다는 집념으로 주저함 없이 이용하는 `나'의 상황을 이기적이거나 파렴치하다고 비난할 용기가 (평화로운)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가.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말한다. “노스탤지어는 본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그리고 “현대적 의미에서 노스탤지어는 불가능한 감정, 적어도 치유는 불가능한 감정이다. 치료법이라곤 시간여행 밖에 없다”고.

기차여행 대신 폭염 속에서 듣는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애절한 선율. 돌아가야 할, 살아있음을 그리워하는 고난의 노스탤지어. `레밍'이 되지 않으려는 한여름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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