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여기가 맨 앞
점, 여기가 맨 앞
  • 안상숲<생거진천숲해설가>
  • 승인 2017.07.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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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안상숲<생거진천숲해설가>

숲속을 자세히 보면 그냥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작아서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들. 손끝에 발끝에 무심히 밟혀도 표시 나지 않는 아주 미미한 것들.

처음 낙엽송의 씨앗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이 숲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의 씨앗이 너무 작아 먼지 같았기 때문이에요. 하늘까지 직선으로 쭉 뻗은 낙엽송 씨주머니 솔방울 속에 촘촘히 채워져 있던 작은 씨앗. 그래도 쇠박새가 겨우내 먹이로 삼을 만큼 제 딴엔 속이 꽉 찬 잘 여문 씨앗이지요.

에게, 저렇게 큰 나무치고 너무 쩨쩨한 거 아니야? 덩치에 맞는 큼지막한 씨앗을 보란 듯이 여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속으로는 그렇게 비웃기까지 했지요.

그 작은 씨앗들 중 누구는 촉촉한 흙속에서 꼬물꼬물 제 몸을 움직이겠지요. 그런 그 미미한 움직임으로 어느 날엔 드디어 초록의 삐죽한 이파리 하나 흙을 뚫고 올라올 테고요. 생각해보세요. 그건 마치 마법 같은 일이랍니다. 작은 한 점에서 시작된 그 움직임이 곧이어 땅을 뚫고 올라와 키를 키우다가 끝내 숲 속에서 가장 키가 큰 거목이 되는 일. 그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변혁이며, 어떤 수사로도 표현되지 않을 만큼 큰 울림을 주는 대목입니다.

손톱보다 작은 괭이밥 이파리 위에 남방부전나비가 알을 낳는 장면을 보았어요. 부전나비는 나비목 중에서도 가장 작은 몸을 하고 있는데요. 대부분 어른의 엄지손톱만한 크기를 넘지 않아요. 그러니 그 나비가 낳은 알이라니요. 돋보기를 들이대도 겨우 한 점. 사진을 찍어 최대로 확대해야 겨우 동글납작한 그 무늬가 보이는 한 점이지요. 마치 0.3mm 가는 펜으로 살짝 찍어놓은 듯한 거기에서 무엇인가 시작될 거라는 생각은 도무지 안 나요.

며칠 뒤 그 작은 점에서 애벌레가 부화했어요. 몸이 작은데다가 괭이밥 잎처럼 연둣빛이어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돋보기를 대고 숨을 죽이고, 한참을 눈 깜박이지 않고 들여다봐야 겨우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지요. 그래도 한나절 있다가 들여다보면 고 녀석이 야금야금 갉아먹은 흔적이 이파리 위에 옅게나마 생기고, 까만 마침표 같은 똥도 뿌려져 있는 게 보입니다. 흔적이 남는다는 건 바로 존재의 증거이지요. 거기, 나비가 시작되는 그 지점.

그렇게 해서 여기 그늘 짙어진 여름 숲이 있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작은 점들이 꼬물대 움직이고 흔적을 남겨 이루어놓은 숲.

숲의 각자는 그렇게 묵묵히 제 몫을 삽니다. 살아가는 길들이 마주쳐 접점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렇게 촘촘히 이어지게 되는 거지요. 그 이어짐은 시간을 넘습니다. 그러니 숲이라는 단어는 그저 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이어짐, 지속성을 의미하는 거지요. 한 점의 움직임이 숲이라는 공간을 채우고 숲이라는 시간을 채워나가는 거지요.

작은 것을 보려면 낮아져야 하지요. 무릎을 꿇고 얼굴을 숙이고 가만 들여다보아야 작은 존재들이 보여요. 숲에서 겸손을 배울 수 있는 까닭입니다. 높은 것을 보려면 올려봐야 하지요. 목을 뒤로 최대한 제치고 아! 탄성을 지르며 입을 벌리고 보아야 그 큰 존재가 느껴지는 거구요. 숲에서 존경을 배울 수 있는 까닭이에요. 겸손함과 존경함은 숲을 보는 겹눈이지요. 너무 작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한 점. 지금 여기가 세상의 맨 앞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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