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하는 게 목숨보다 귀한 세상
보고 하는 게 목숨보다 귀한 세상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7.07.18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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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김금란 부장(취재3팀)

급박한 상황이었다.

청주 우암동 일대 주민들은 지난 16일 오전 혼비백산하며 집을 뛰쳐나왔다. 기습 폭우로 집도 도로도 잠겼다. 길이 어디인지 분간도 안 되는 당시 상황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나마 침수가 되지 않은 인근 초등학교로 피신했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을 포함해 10여 명은 벌벌 떨고 있었다. 대피한 주민들은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강당 문을 열어줄 것을 당직자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 경비를 맡은 용역직원은 열어줄 수가 없었다. 경찰 2명이 주민들과 서 있는데도 당직자는 학교 관리자로부터 허락을 맡아야 했다. 그는 학교 관계자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하필이면 강당 관리 주체가 초등학교 옆에 붙은 중학교였다. 초등학교 관계자는 “중학교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강당 개방 여부를 중학교에 떠넘겼다. 이런 사이 30~40분이 지났다. 중학교 학교장은 우암주민센터로부터 대피시설로 개방해 줄 것을 연락을 받은 뒤에야 적극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행정적 절차로 보면 보고체계는 흠잡을 데가 없다. 평소 같으면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재난 상황에서도 상부의 보고 체계를 지켜야 하는 게 우리나라 교육 및 행정기관의 현주소다.

상부 보고 없이 강당문을 열어 대피한 이재민을 보호하고 조치를 취했다면 문책의 사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재난상황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는 모양이다.

안전 매뉴얼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학교를 재난대피시설로 사용하도록 명시돼 있다. 하지만 막상 재난 상황이 터지고 보니 대피시설로 사용해야 할 학교 시설은 학교장의 허가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다.

청주 율량천의 범람 위기로 청주 내덕동 주민에게는 청주농업고가 대피장소였다. 오전부터 이 지역 통장은 집집마다 돌며 청주 농고로 대피해야 한다고 공지했다. 급한 마음에 자녀 집으로 피신 간 주민도 있었고, 집 마당에 들어온 빗물을 퍼내며 한숨을 짓는 주민도 있었다. 주민 한 명이 인터넷을 뒤져 청주농업고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교무실도, 행정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직실로 전화했더니 강당 문은 열어놓았으니 오면 된다는 말만 했다. 비상사태인데 학교 관계자는 누가 출근했느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휴일인데 누가 나와요?”였다.

16일 오전 7시부터 국민안전처와 청주시는 재난 상황을 실시간 문자로 발송했는데 학교 관계자들에게는 그저 휴일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지 몰랐다는 게 통화를 주고받은 학교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행정 편의주의 행태는 또 있다.

아동 학대 범죄가 잇따르면서 지난해 교육부는 학생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선 학교에 `미취학 및 무단결석 등 관리·대응 매뉴얼'지침을 시달했다. 지난해 초 일선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교육부는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은 취학예정자의 소재파악은 물론 사유까지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교사들은 출국한 아이의 경우 국제전화를 걸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쫓아다니며 출국 자료 수집에 나섰다.

아이의 부모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친인척을 수소문해 외국으로 떠난 것을 알고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출국 자료를 요청하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료공개가 어렵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법도 규정도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법도 규정도 사람을 위해 만든 사회 구성원 간 약속이다. 행정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위해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을 위한 행정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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