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7.13 2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양자역학의 학문적 기반을 만든 슈뢰딩거는 위대한 과학자인 반면에 대단한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윤리적으로 깨끗했던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그랬고, 파인만도 그랬고, 괴테도 그랬고,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예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예는 과학, 문학, 예술, 정치 등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결국, 진리에 접근하는 능력과 윤리적인 성품과는 별로 관계가 없나 보다. 그러니 윤리는 접어두고 과학 얘기만 해 보자.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양자역학의 가장 핵심인 불확정성 원리, 양자중첩, 양자 얽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을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내면은 양자역학의 대척점에 있는 고전역학에 대한 믿음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등이 제기하는 그러한 특이한 양자현상에 대한 반박의 수단으로 만들어낸 가상실험이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상자 속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고, 상자에는 독가스통이 있는데, 이 독가스통은 1분 내에 터질 확률이 1/2이라고 하자. 그럼 1분이 되었을 때 이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살았을 확률이 반이고 죽었을 확률이 반이다. 1분이 되었을 때 문을 열어보면 죽었거나 살았을 것이다. 이 실험을 1000번 한다면 대략 500번은 죽은 고양이를, 500번은 산 고양이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를 할 것이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내 글은 읽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고양이가 죽어 있을까 살아 있을까? 이다. 물론 죽어 있을 확률이 반, 살아있을 확률이 반이다. 그런데 문제는 확률이 아니라 고양이의 실제 상태가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고양이가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시점에서 이 말이 이해가 되는 사람은 앞으로 내 칼럼을 보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내 칼럼을 볼 필요가 없는 천재거나 아니면 보아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바보, 둘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고사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면 앞으로 내 칼럼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어 있는 고양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그런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슈뢰딩거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예화는 오히려 일반대중에게 양자중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좋은 예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양자중첩 현상은 여러 물리적 상태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현상은, 관측하기 전에는 다양한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관찰을 하는 순간 그 중의 하나의 상태로 나타난다.

이 양자중첩을 좀 더 확장해서 인생사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미래에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될지 실패할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현재의 나는 성공과 실패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패나 성공 둘 중의 하나가 현실이 될 것이다. 모든 미래는 양자중첩 상태다. 시간이 흐르면 이 중첩 상태의 어느 한 상태가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진실은 O 아니면 X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흑과 백으로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중첩적이고 모호하다. 이 모호함이 진실의 오묘함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