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느정이
밤느정이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07.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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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백세 인생이란다. 오십 문턱을 넘어섰으니 반으로 접힌 나이테가 점점 많아지면서 싱숭생숭 감성의 굴곡이 파도타기를 한다. 태양의 열기는 폭염만큼 불쾌지수도 높이 올려놓았다. 검은 아스팔트도로의 달궈진 열기가 후끈후끈 솟아오르고 날마다 비가 그립다.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 요즘 자연의 향기 맡으며 지근거리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의 기류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출사를 핑계 삼아 부여로 발걸음을 했다. 가는 길목 내내 밤나무가 온산을 뒤덮고도 모자란 듯 갓길까지 늘어져 있다. 밤느정이 피기 시작하면서 더위가 시작되고 밤이 영글면서 더위는 한풀 꺾여 막을 내린다. 밤느정이 피는 시기에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선조들은 꽃이 무성하면 흐린 날이 계속된다고 했으니 혹여나 소나기라도 만날까 마음이 바쁘다. 장미꽃처럼 매혹적이지도 않고 백합처럼 향기롭지도 않은 밤느정이, 마치 엉킨 실타래 같기도 하고 푸들강아지 치켜세운 꼬리 같기도 한 밤느정이, 멀리서 보면 거품이 하얗게 이는 빨래통 같기도 하고 튀밥처럼 뭉글뭉글 뭉쳐 있다. 성숙한 남자의 향을 지닌 ‘양향(陽香)’이라는 꽃, 바람 물결을 따라 그 향기는 온산을 뒤덮었다.

여름날 잔가지마다 방울토마토 마냥 주렁주렁 여린 가시를 달고 있는 초록똘기는 귀엽기만 하다. 장미꽃 뒤에는 가시가 있듯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가시 옷을 입은 밤송이는 요염하기도 하다. 온산을 뒤흔들며 뿌리조차 뽑아 버릴 것 같은 태풍이 온몸을 뒤흔들어도 본능적으로 가시를 세워 자신을 보호한다. 가을이면 표독스런 발톱처럼 밤톨을 싸고 있는 가시가 성난 것처럼 돋아 있는 밤송이, 낙엽이 물들면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벗는 것처럼 저절로 벌어지는 아람이다.

속이 꽉 찬 밤은 까기도 힘들다. 자치 잘못하면 가시에 찔려 혹독한 매운맛을 보아야 한다. 마치 성숙한 삶의 길목 매사에 조심스럽게 신의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이치처럼 말이다.

가시 옷을 벗으면 농익은 여인의 곱고 깊은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두터운 가죽이 막 터지는 아람은 혼기가 꽉 찬 처녀 모습이다. 앙탈스럽게 옷을 벗은 처녀 같은 아람, 매끈하고 탱탱한 아람은 수줍은 듯 발그레하게 물든 아람은 수면위에 미끄러지는 햇살처럼 반짝거리며 터치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은 물방울 같다. 촉촉하고 상큼한 광채가 빛나는 여인의 피부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아람, 영근 아람을 보면 언제나 한 송이에 세 알이 들어 있어서 선조들은 후손 중에 영의정, 좌의정 그리고 우의정인 삼정승을 염원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알밤을 줍는 태몽은 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재물 복을 타고 난다고 해 길몽이라 했다.

제삿날이면 밤을 까는 아버지주변은 늘 어수선했다. 우린 들락날락하면서 쪽 밤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아삭거리며 입안에서 씹히는 달달하고 감칠맛 나는 밤을 서로 먹으려 줄을 서기도 했다. 제사상에도 오르지 못하는 쪽 밤, 이른바 한 톨 안에 두 쪽이 들어 있는 쌍동밤이라고도 한다. 쪽 밤이 나오면 왜 그런지 몰라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반드시 다른 사람하고 나누어 먹어야 만복이 들어온다고 하셨다. 반쪽이기 때문에 서로 나눔으로써 한쪽을 완성 시키는 걸까?

밤나무는 독특하다. 화초나 식물을 씨앗으로 심으면 심은 씨앗은 사라지거나 쭉정이가 되어버리지만, 밤만은 땅속에 심은 최초의 씨 밤은 싹이 트고 아름드리가 되어도 절대로 썩지 않고 그대로 씨 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는 밤나무, 조상을 모시는 위패(位牌), 신주(神主)를 밤나무로 깎는다. 끝까지 씨 밤이 나무뿌리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선조들은 밤나무처럼 조상을 끝까지 잊지 않는 마음을 기리기 위함이리라.

한 해를 반으로 접은 요즘, 반쪽은 미래다. 그리고 반으로 접힌 내 나이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논어는 오십을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이라 했다. 불혹을 지나는 모롱이에 애가 타고 가슴 저린 사랑과 그리움 기다림을 알았다. 그리고 내 삶도 반올림 되었다. 오십에 물든 노을, 반쪽은 지평선 그리고 반쪽은 희망점에 걸렸다. 길이 끝난 곳에 길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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