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비
삼세비
  • 박재명<충북도 동물보호팀장>
  • 승인 2017.07.1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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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박재명<충북도 동물보호팀장>

해마다 겨울이면 가축 전염병에 시달린 나에게, 목련꽃은 희망과도 같았다. 목련의 흰 꽃이 열릴 즈음이면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서서히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긴 겨울의 칙칙함을 벗어 던지듯 도청의 정원을 밝히는 목련나무가 있다. 지난봄, 겨울이 지나가고 첫 비가 오던 날 순백의 목련꽃이 온몸으로 찬비를 맞으며 꽃잎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반면에 옆 지기 느티나무는 생기를 얻어 새순을 피우고, 명자꽃 꽃망울은 부풀어 올랐다. 우암산 숲에서 도심 속 벽돌 틈새까지 새싹들이 비집고 올라와 만세를 불렀다. 첫 비를 맞으며 쓸쓸히 꽃잎을 떨구던 목련은 자신을 순교하여 다른 생명을 구하는 듯하였다.

두 번째 비는 오지 않았다. 오래 걸렸다.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가뭄이라고 했다. 저수지 바닥은 손바닥이 들어갈 정도로 쩍쩍 갈라져 갔다. 초여름임에도 산불이 일어나고, 풍년을 꿈꾸며 심었던 벼들은 누렇게 타들어갔다. 그러던 유월 어느 날 두 번째 비 소식이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마다 하나씩 꽃을 피웠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에 단비는 목마른 대지보다 사람들이 더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두 번째 비는 더 올 듯 말 듯하며 사람들의 애만 달구었다. 비구름은 모였다 다시 저 멀리 가버리고, 또다시 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저수지는 물이 담기기 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산간계곡의 물도 말라갔다. 오가는 사람마다 가뭄을 걱정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봄 농사는 포기한 농부의 탄식이 흘렀지만 무심한 하늘은 쾌청하기만 했다. 어느 지방에는 비가 제법 온다는데 하필 내 삶의 터전은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다. 구름이 잔뜩 끼고 비를 곧 퍼부을 듯하다가 결국 오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런데 정말 비다운 비 소식이 왔다. 그것도 풍족하게 온단다. 하늘을 떠돌던 장마 구름이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빗줄기가 굵은 선을 그으며 내렸다. 비도 생각하면서 내린다고 했는데, 이번 비는 정말 작심하고 내리는 것 같다. 해갈이다. 그동안 얼마나 갈증에 시달렸던지 비를 맞는 풀마다 나무마다 춤을 췄다. 연못이든 옥상이든 물이 조금만 고여 있어도 비를 맞을 때마다 동그랗게 OK 사인을 하며 웃었다. 비를 맞으며 모종을 옮겨 심는 농부의 얼굴도 활짝 폈다. 세 번째 내린 `삼세비'는 오랫동안 가뭄에 애태우던 사실을 잊게 하였으나, 밤낮으로 내리는 통에 너무 많이 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왔다.

우리는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삼세판을 부르짖는다. 한 번의 승부로는 이기든 지든 찜찜하다. 뭔가 확실하지 않아, 믿음이 갈 때까지 승패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삼세판을 통해 첫 번째 두 번째의 모자람을 만회하기 위해 마지막 기를 쏟아 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올 듯 말 듯했던 비도 삼세번 째는 충분히 내려 세상의 근심을 털어냈다.

우리는 삼세판을 통해 혼신의 힘을 더하여 간절한 소망을 이루곤 한다. 수년째 겨울 가축전염병을 겪으며 올해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벌써부터 걱정과 오기의 기로에 섰다. 가축전염병의 청정을 이루기 위해 한 번 더 도전할 것인지, 피해 갈 것인지 갈등하고 있다. 혼자만의 힘으로 풀어나가기엔 너무나 많은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다. 이 상황을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발목을 잡는다. 무모한 오기가 문제의 해법은 아니지만 삼세비의 넉넉함을 바라보며 삼세판을 생각한다. 다가오는 겨울방역의 설계. 이대로 피할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죽을힘을 다할 것인가의 길목에 서서 주룩주룩 내리는 세 번째 비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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