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긋다
비를 긋다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7.07.0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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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니 집안이 눅눅하다. 제습을 해도 잠시뿐이다. 빨래 뽀송하게 마르던 날들이 그립다.

오랜 가뭄에 타들어가는 들녘을 보며 기도하듯 비를 기다리던 게 엊그제인데 사람마음 참 가볍다. 반가운 비에도 희비는 엇갈리는 듯하다. 가뭄해갈에 역부족인 지역도 있고 집중 호우로 피해를 당한 곳도 있으니 집안에서 느끼는 꿉꿉함은 말을 내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장마 틈새 하루쯤 땡볕이었음 좋겠다.

잠시 비가 긋고 <아베마리아>를 듣는다.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이네사 갈란테의 음색으로 반복되는 아베마리아는 기도처럼 경건하고 숭고하다. 한낮에 듣는 아베마리아에는 늘 옥수수밭 푸른 물결이 함께 흐른다.

지난여름 시외지역 방학특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부러 옛길로 들어섰다. 새로 생긴 자동차전용도로가 있지만 한낮 불비에 자동차들이 내뿜는 열기까지 더해져 후끈 달아올랐을 아스팔트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편으론 특강이 끝난 터라 마음도 홀가분하고 잠시지만 자연을 벗 삼아 즐기는 눈 호강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마을을 지나면 산모퉁이, 산모퉁이를 돌면 푸른 들, 그리고 다시 낮은 산과 산 사이. 옛길은 익숙한 리듬 같다. 창을 여니 달아오른 한낮의 후끈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오후 한시 옛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쓸쓸해졌다. 오늘따라 지나는 차량도 없고 이따금 후다닥 튀던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스쳐 지나는 마을에도 들에도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두가 숨죽인 듯 적막감이 흘렀다.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스며들었다. 한낮의 그 고요가 조금쯤 불안하고 쓸쓸해지며 한가지로 짙어진 녹음마저 멀미가 나려 했다.

그런데 뜨거운 고독이 깊어질 무렵 시야가 트이며 옥수수들판이 펼쳐졌다. 푸르고 늘씬한 이파리들이 바람에 수런거리며 뿜어내는 건강한 숨결이 나도 모르게 차를 멈추게 만들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출렁대는 옥수수밭 위로 청정한 하늘. 그 하늘과 맞닿은 부드러운 능선들. 늘 보던 풍경인데도 생경하게 다가오며 왈칵 눈물이 났다. 그때 라디오에서 <아베마리아>가 흘렀다. 이네사 갈란테. 한낮 뜨거운 땡볕 아래 듣는 그녀의 아베마리아는 만물을 위한 기도 같고 들녘 생명들에게 보내는 칭송 같았다. 내게 늘 <아베마리아>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마음을 다스리며 듣기에 어울리는 기도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한낮 뜨거운 들길에서 만난 <아베마리아>는 환희와 정열을 담은 생명의 찬가였다. 만물이 귀하고 위대하게 여겨지며 이런 세상에 나를 놓아주신 조물주에 감사했다.

그 여름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무더위도 폭풍도 주는 대로 견디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 세상에 머물다 가는 생명은 모두 위대하고 아름답다. 수고를 마다않고 최선을 다해 한 생애를 살다가는 눈물겨운 존재다. 묵묵히 견디고 매사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구름 틈새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아베마리아>를 되감기 해 들을 수 있는 오후의 여유가 주어짐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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