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史官)과 언론
사관(史官)과 언론
  • 박경일<명리학자>
  • 승인 2017.07.0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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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로 보는 세상이야기
▲ 박경일

춘추전국시대 `최저'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저는 제나라의 대부로서 제장공의 신하이자 제장공이 군주에 오를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신이었다.

최저에게는 `당강'이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왕인 제장공이 그녀를 탐하였다. 제장공은 당강의 미모에 넋을 잃고 마침내 두 사람은 깊은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최저는 왕을 없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제나라에 중대한 행사가 있었는데 최저는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았다. 왕인 제장공은 쾌재를 부르며 병문안을 핑계로 당강을 만나기 위해 최저의 집으로 향했다. 그것은 왕을 시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최저의 함정이었다.

현실을 뒤늦게 깨달은 제장공은 도망치려하였지만 최저의 병사들에게 난자당하여 죽었다. 최저는 왕을 죽이고 제장공의 배다른 아우를 새 군주로 옹립하였다.

이때 제나라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하다”라고 썼다가 최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사관의 둘째 동생이 사관직을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하다”라고 썼다. 최저는 사관의 동생도 죽였다. 셋째 동생이 다시 사관직을 이어받았다. 그도 역시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하다”라고 썼더니 두려움 없는 사관 형제의 기개에 눌린 최저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지난날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 오늘의 역사는 반드시 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 그 옛날 사관의 기록은 왕조차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최저처럼 왕도 아닌 신하가 역사의 기록을 보고 왜곡을 지시하고 사관을 죽였다는 자체는 망해가는 나라의 증표일 수밖에 없다.

현대에서의 사관은 언론의 역할이다. 통치자나 위정자들이 거울처럼 매일 볼 수 있고 자신을 스스로 단정히하는 규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고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권력으로부터 언론은 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비겁하고 미약한 언론의 행태를 잘 보여주는 실화로 러시아와의 전쟁에 패한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20일 동안 변화하는 언론의 행태를 들 수 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을 때 “식인귀 소굴을 빠져나가다!”

지지군을 이끌고 그랑느블르에 도착할 즈음 “괴물 그랑느블르에서 숙영을 취하다.”

나폴레옹군이 파리근교에 이르자 “보나파르트 전진해오지만, 파리 입성은 결코 없을 듯.”

파리시 개선문에 이르자 “황제 폐하 보나파르트 입성!”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한 `디지털 뉴스리포트 2017'에 따르면 미국, 유럽, 일본을 포함한 36개국 중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36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것은 검열제도로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정부와 언론이 심각한 갈등을 겪는 말레이시아 및 슬로바키아보다도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2개 공중파 방송 노조가 각각 사장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이번 기회로 무너진 공영방송이 제자리를 찾기 바란다.

그 옛날 목숨을 걸고 진실을 기록하려는 사관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양심을 걸고 진실을 말하려는 언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 전원구조의 오보를 일제히 쏟아내고 사망자들의 보험료를 계산하는 등의 쓰레기 같은 짓거리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언론에서는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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