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자연과 생명 그리고 욕망의 변주곡
‘옥자’, 자연과 생명 그리고 욕망의 변주곡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7.04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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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옥자>를 봤다.

산골소녀 `미자'와 함께 먹고 자는 `옥자!'를 극장에서 봤는데, 내가 본 것은 환상이다. 실제로 보기는 했으나 슈퍼 돼지 `옥자'의 실체를 본 것은 절대 아니다.

은근한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 생명체가 멀티플랙스 거대 자본의 훼방에도 작은 영화관을 중심으로 인간의 관심을 이끌고 있음이 우연일까.

많고 좋은 육식에 대한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아니 조작해 낸) 슈퍼돼지 `옥자'의 속내에는 거대한 자본주의의 음모가 있다.

그 영화 <옥자>는 기존의 영화 배급 시스템을 따르지 않고 넷플릭스를 통한 온라인 스트리밍 개봉이라는 반동이 있다. 그리고 거대 영화자본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작은 극장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육식에 대한, 자본에 대한 탐욕을 경고하는 `옥자'가 과점적 지배의 영화 배급시장과 골목상권의 대비를 함께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옥자'는 종족번식을 통한 자연계의 순리적 순환 질서를 무시하고 태어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본은 `옥자'를 결코 생명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저 부위별로 양과 질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고깃덩어리로 취급할 뿐이다. 그런 `옥자'가 대한민국 강원도 깊은 산골의 `자연'과 만나면서 반려동물의 신분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가족으로 자라난다. 그런 순수한 자연 속에서의 인과관계를 통해 세계 최우량 슈퍼돼지로 선발되는 역설은, 말하자면 환상이다.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은 유전자 조작이라는 과학적 스토리텔링과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으로 작동되는 영화 속 `옥자'를 보는 행위에 대한 고통과 수시로 교차된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을 통해 산업화된 인간의 육식이 동물에 대한 대량 학살과 잔인한 도축, 가축의 사육과정에서 야기되는 토지 부식과 오존층 파괴 및 지구 온난화, 비정상적인 비만과 상대적 기아와 기근 등 동물과 자연, 인간에 대한 세 가지 폭력을 경고한다. 그는 또 육식의 폭력성으로 인한 남성-여성 계급 구조의 고착화와 남성 지배적 문화의 형성을 경고한다.

유전자 조작 슈퍼돼지 `옥자'를 도살에서 구해내는 인간적 생명 윤리의 안간힘이 산골 소녀 `미자'를 통해 발휘되고 있음은 이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결국 `옥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은 환치되는 황금돼지이니, 자본의 엄청나게 견고한 위력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수많은 아류의 `옥자'들이 속절없이 도살되어 고깃덩어리로, 생명이 아주 하찮게 식품으로 둔갑하는 탐욕에서, 전기 울타리 너머로 `옥자'의 품에 남겨진 어린 슈퍼돼지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폭력을 암시하는 듯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한다. “낯설지 않은 것을 낯설게 느껴라! 익숙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느껴라! 일상적인 것에 너희는 놀라야 한다. 규칙이라고 하는 것의 오용을 알아차려라. 그리고 오용인 걸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

비인간적 과학을 통한 자연과 생명의 질서 유린은 낯설지 않게 인류를 위협할 것이다.

나는 오늘 `봤다'와 `보았다'사이에서 첫 문장을 고민했다. `봤다'는 단절의 느낌이 크고, `보았다'는 이어질 수 있는 멈춤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그리고 자연과 생명은 결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나는 `옥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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