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언제나 빛나는 청년이셨습니다
- 오세탁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은 언제나 빛나는 청년이셨습니다
- 오세탁 선생님 영전에
  • 임찬순<시인·희곡>
  • 승인 2017.07.03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 임찬순<시인·희곡>

`하늘은 사람이 질 수 있을 만큼의 짐을 지운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질 수 없을 정도를 크게 넘는 잔혹한 짐을 우리 민족이 온전히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신음하던 일제 강점기, 민족과 함께 너무나 무거운 그 짐을 등에 얹고 삶을 출발한 선생님들의 세대는 자유와 언어와 종교 심지어는 생존권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귀한 성명까지 빼앗긴 채 아름다워야 할 어린 시절을, 청소년기를 그렇게 아픔으로 보내셨습니다.

광복을 맞고도 조국은 분단되고 전쟁이 터져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고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수난을 겪고도 선생님은 빛나는 청년이 되셨습니다.

조부는 2천석의 부유한 재산가여서 일찍부터 서울 명문 학교를 다녔고 성적은 뛰어났습니다. 개인적인 불행이 닥쳐 난청으로 학교 수업을 정상으로 소화 할 수 없는 속에서도 수석으로 졸업하여 경기고보의 엄격했던 입학시험 면접 때 그 난청으로 계속 엉뚱한 동문서답을 하여 합격하지 못한 슬픔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때 중앙고보의 현상윤 교장이 그 소식을 듣고 그 학교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도 교실 맨 앞에 앉았으나 수업을 다 알아듣지 못하여 “나는 혼자 자습하여 졸업을 했다”고 고충을 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고도 서울 법대에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법대 교수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특별히 아주 젊은 날부터 문학에 뜻을 두셨고 그 파란 많은 조국의 모습과 치열했던 스스로의 삶 속에서 뿌리박힌 이야기를 문학에 담으셨습니다.

1950년대에 청주에서 신동문, 민병산, 박재용, 이설우, 최병준, 송주헌선생님들과 함께 앞장서서 충북예총을 창설하셨고 적극적으로 청주문인협회를 출범시켰고, 예총회장과 여러 차례 문협 회장을 엮임한 우리 고장의 선구자셨습니다.

「예술 문학은 근세에 와서는 종교가 되었다」고 앙드레 마르로가 말했듯 당시 고등학생 「푸른문」 동인이었던 저희들에게 진실로 문학은 종교였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저희들에게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등대였으며 존경스러운 담임선생님이셨고 담임목사 격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 문인협회에 들어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충북문학(청주문학)창간호를 펴냈고 일생을 지근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청주에서 50년대 문학을 통해 만든 사람들」이란 뜻의 청오회를 만들어 매달 만나 대화를 엮고 가르침을 받고 「돌체시대」라는 동인지를 또 선생님 모시고 창간했습니다.

언제나 밝고 열성적인 신뢰감 넘치는 언행으로 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어 주변은 항상 풍요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또 항상 청청한 청년처럼 신선했습니다.

그런 일생을 사셨던 선생님과의 이별, 하염없는 슬픔이 가슴 가득 넘칩니다. 등불 없는 어둠속에 던져진 것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여러 권의 시집과 저서를 남기셨고 문인협회는 정성을 담아 선생님을 기리는 시비를 미동산에 우뚝 세웠으나 어찌 저희들의 서러움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모든 짐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소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