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대한 사소한 변명
밤에 대한 사소한 변명
  • 서두상<청주시 강서2동 주민센터 주무관>
  • 승인 2017.07.0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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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 서두상

최근 황현산 작가의 `밤이 선생이다'란 책을 읽었다. 제목과 함께 인터넷 카페에 올린 이름 모를 누군가의 짧은 추천 글 중 하나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깨달았다'라고 했던 것 같다. 너무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서평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하품처럼 따분한 서평 하나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책 어디에도 밤은 언급되지 않는다. 간혹 어둠이 짙은 유신 시절이나 태백의 잿빛처럼 흐린 시내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는 홀로 밤을 느꼈다. 그 밤은 지극히 외롭고 쓸쓸하고 또, 자연스러웠다.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에게 내 과거의 실수와 실패와 부끄러움에 대해 토로하고 싶은 깊은 충동 또한 느꼈다. 그리고 마치 책 속에서 연세 지긋한 노인이 내게로 나와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잠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방황해야 할 이유도 모른 채 방황하던 20대의 나는 한 마디로 밤과 같았다. 그 시대의 다른 청춘들처럼 뚜렷한 목표도 없이 음지로만 걸었다. 캠퍼스의 낭만을 뒤로한 채 기형도의 시에 위안을 얻고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를 저녁 가로등을 좇는 나방처럼 파득거리며 훑었다. 게다가 밤과 낮이 뒤바뀐 생활이 길어졌다. 그럴수록 밤낮의 구분은 점점 흐려져 갔다. 나는 흔히 `폐인'이라 부르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아마 그 즈음에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밤을 사랑했다. 밤이 가져다주는 적막과 고요, 고요를 깨고 가끔 들리는 소음들, 마치 엇박자 같은 조화가 가져다주는 평화를 또한 좋아했다. 그 평화 속에서 낮의 상처들은 서서히 아물어갔으며 온전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은 늘어갔다.

그렇게 사랑하던 저녁과 밤하늘과 첫사랑의 눈동자 같던 가로등불과 혼불 같은 별들과 세상을 삼킨 침묵들에 이별을 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후반 동아리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시골에서의 첫 직장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밤과의 작별을 부추겼다. 생계는 이렇게 가끔,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슬펐다.

산골 마을의 밤과 겨울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왔다. 게다가 젊은 청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그렇게 지루한 시골에서의 삶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깨달았다'라는 서평처럼 나는 의도치 않게 전과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이란 단어보다 무거운 단어가 있다면 기껏해야 `삶' 정도지 않을까 한다. 적어도 `청춘'이나 `꿈'보다는 `가장'이 확실히 무겁다. 내게는 그런 무게감을 견딜만한 직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직을 했다. 그러면서 밤이 가져다주는 낭만을 확실히 거부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다. 이제 난 밤이 그립지 않다.

`밤이 선생이다'의 제목에 끌려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담담한 어투로 쓴 산문집이 왜인지 어둠처럼 무겁게 읽혔다. 작가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던 내게 일침을 가한다. 일침 속에서 애써 외면하던 생계형 내가 되살아난다. 부끄러운 오늘 밤에, 그믐날의 임도처럼 캄캄한 밤길을 나는 다시 걸어본다. 밤이 낮처럼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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