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도 예의도 없는 침묵
명분도 예의도 없는 침묵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7.07.0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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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문자 메시지에서는 공포감과 다급함이 뚝뚝 묻어났다. “고소 취하를 부탁드립니다. 이 일로 구속당한다니 너무 두렵습니다.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아들의 채용 특혜 의혹 증거물을 조작한 혐의로 구속된 이유미씨가 지난달 25일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에게 전했던 메시지다. 국민의당이 희대의 사기극을 자백하기 바로 전날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씨가 조작한 이 녹취록을 놓고 서로 고소·고발한 상태다. 대선 직전 녹취록을 앞세운 국민의당의 공세에 민주당이 허위사실 유포를 걸어 고발하자 국민의당도 무고로 맞고소를 한 것이다. 검찰 수사가 압박해오자 이씨가 안 전 대표에게 `국민의당이 먼저 고소를 취하해 민주당도 고발을 거두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구명을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애절한 메시지는 답신을 받지 못했다. `무슨 취지인지 몰라 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 전 대표의 해명이다.

이씨는 카이스트 대학원 시절 안 전 대표의 제자였다. 지난 대선에서는 자원봉사자로 그의 캠프에서 동분서주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안 전 대표가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과 경쟁할 때도 그의 캠프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이씨는 `안철수와 함께한 희망의 기록 66일'이라는 책을 펴내 사실상 안 전 대표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대선출마를 선언하고 중도 사퇴하기까지 66일간 안 전 대표의 역동적 여정과 인간적 고뇌를 담아낸 책이다. 안 전 대표에게 이씨는 평범한 당원도, 단순한 지지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이씨로부터 “죽고 싶다”는 절박한 문자를 받고도 외면한 대목은 또 다른 시각에서 안 전 대표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냉정한 대응에서는 제자를 보듬는 스승의 모습도, 헌신한 추종자를 대하는 멘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한 미련을 접었을 것 같다.

“정치는 책임을 지는 것,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내려놓겠다”. 지난해 총선 직후 국민의당이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휘말리자 책임을 지고 공동대표를 사퇴하며 안 대표가 했던 말이다. 그랬던 그가 당이 증거조작을 사과한 지 1주일, 이씨가 구속된 지 나흘이 지나도록 함구하고 있다. 당내에서도 그의 입장 천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그의 침묵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제 무책임에서 몰염치로 악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대선 출마에 직결된 문제이다. 범행의 방식과 범위에 상관없이 그 목적은 안 전 대표의 정치적 이권을 지향했다. 오늘 검찰이 소환할 이준서 전 최고위원 등 사건의 직접 당사자들도 모두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당의 위상도 말이 아니게 됐다. 지지율은 급락해 5대 정당 중 꼴찌로 추락했다. 안방인 호남에서조차 “이제 국민의당은 광주의 수치가 됐다”는 뼈아픈 질책이 쏟아진다. 대놓고 탈당을 언급하는 의원이 나올 정도다.

나는 몰랐으니 책임질 일이 없다는 식의 입장은 당 대표였고 대선 후보였던 당의 상징적 존재인 그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다른 당직자들을 오도하고 당을 벼랑으로 몰고 간 점까지 책임을 떠맡게 됐다. 콩가루 정당이 됐는데도 당직자 대부분은 `이씨 단독범행'을 합창하며 검찰만 바라보고 있다. 당을 대신해 홀로 고초를 겪고 있을지도 모를 한 여성당원 뒤에 숨어 자신의 정치적 연명을 궁리하는 가련한 모습들에 다름아니다. 이씨가 제공한 어설픈 녹취록으로 상대를 공격하던 집요하고 당당했던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 9단이라는 당의 좌장이 사과 대신 “목을 내놓겠다”며 부리는 허세와 기만은 이제 신물이 난다. `민주당이 국민의당을 죽이려 하고있다'는 낯두꺼운 반격은 연민의 정이 들 정도다. 만일 민주당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면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 선거 무효와 불복을 외쳤을 사람들이다.

안 전 대표는 이런 말도 했다. “돈도 기술도 사람 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우위냐, 전략이 우위냐는 질문을 받을 때 당연히 인간이 우선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태도에서는 합리적 전략도 인간적 성찰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한 때 문재인 대통령을 위협하기도 했던 국가지도자급 인물이다. 당 차원을 넘어 실망하고 상처받은 지지자들부터 위로해야 할 때다. 그래서 그의 침묵은 더 이상 연장돼선 안 되고, 침묵을 깨는 방식은 구차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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